서울로 가는 길
첫 번째 자취 집은 1년도 채 살지 않았지만
세상 많은 것들의 '처음'이 그저 처음이라 의미를 부여받듯, 그 집도 그러했다.
성북구 동선동에 위치한 나의 '첫' 자취집은 지하철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 빠르고 조급한 도보로 ) 위치해있는 초 역세권의 집이었다. 이 '5분'은 조금 마법 같은 시간으로, 우리가 걸을 땐 10분보다 조금 덜 걸리는 정도였지만, 중개인이 '아이, 5분 안 걸려요!'라며 그가 제 앞길만 재빠르게 걸으면 5분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정확히 말해서 속보 5분의 그 집은 살짝 후미진 골목에 위치해있었다. 주택을 개조한 원룸이었는데, 내가 본 매물은 20x호라고는 하나, 사실상 1층인, 그런 집이었다. 정문에서 계단 세 칸만 오르면 2층이 되는 신기한 집.
그 위 3층엔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이를 두고 나는 윗집이 주인인인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고, 엄마는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조금 걸리는 그 점을 제외하고, 26년을 편리한 교통 속에서, 도보 혹은 지하철 20분 이내로 통학하고 다닌 나로서는 회사와의 거리가 첫 번째로 중요했다. 그 점에서 그 집은 완벽했다. 그리고 채광. 정남향의 그 집은, 눈부신 채광으로 우리를 맞아줬다. 추위에 덜덜 떨며 종일 돌아다녔던 집 구하기 원정대는 이 따뜻한 햇살에 마음이 녹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월 50에서 60만 원의 몸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반지하집을 돌아보다 만난 집이라 그런지 마음에 들었다. 월셋집에서 보기 힘든 크고 튼튼한 창도 점수를 더했다. 그땐 큰 창이 그저 좋아 보였는데 1층 같은 2층이라 안팎으로 잘 보일 수 있는 점은 간과했었다. 큰 창에 감탄하고 있던 나와 달리 세면대에 샤워기가 달린 것에 충격을 먹은 엄마는 '여기서 살 수 있냐?' 되물으며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고 말했다. 그건 원룸생활도, 자취도 해본 적 없는 엄마의 시선이었고, 샤워부스가 있는 집으로 가면, 위치나 월세 중 무엇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당장 월세를 내야 하는 나는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주변 지인들은 입을 모아 집을 잘 구했다고 해줬다. 그게 빈말이었던 아니었던 적어도 내 눈엔 나쁘지 않았다.
당장 집을 구해야 했던 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그 집으로 계약했다. 문제의 샤워부스가 있는 집을 보고 온 후였지만 그곳은 위치와 월세 둘 다 포기해야 하는 집이었다.
집을 보러 다녔던 건 1월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유독 추웠던 날이었다. 서울의 추위란...! 대프리카에서 올라온 남쪽 사람들에게 혹독한 날씨였다. 집 구하기 원정대에 객원멤버로 자원 참가 한 자가 있었으니, 사촌동생이
먼저 서울 자취를 시작한 터라, 서울에서 집을 구해본 경험이 있는, 부산에 사는 둘째 이모였다. 그녀는 화를 잘 내는 법이 없고, 온화한 성정의 여성으로 일반 사람들보다 조금 큰 목청을 가졌는데 이는, 엄마 집안의 내력이었다. 성북동 일대를 탐방했던 중개업자 중 하나는 내 또래의 남자였다. 그는 엄마와 이모의 말을, 다소 강력한 부산 사투리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종종 당황해했었다. 그러면 나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통역해주었는데, 예를 들어,
이모 : 여기 일 있는 집은 아니지예? 도어록 그른 거처럼??
( 흉흉한 사건이 있었던 그런 집은 아니죠? =집 분위기가 음침합니다. 너무 어둡습니다.
중개인 : 무슨.. 일.. 예??
이런 식이 었다. '일 있었던 집'에 이모가 유의했던 것은 공효진 주연의 '도어록' 영화의 영향이었다. 여자 혼자 사는 원룸에서 일어난 사건. 이모 머릿속에 그게 계속 맴돌았던 것이었다.
다른 중개인이 말도 안 된 집을 보여줬을 때는 앞에선 '채광이 좋다' 하곤 빨리 자리를 피했고 중개인이 사라지면 "그게 말이가 방구가!"=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며 엄마와 언성 높여 분개했다.
부산시 웅변대회 출신 엄마와, 또 같은 피의 이모의 목청으로 길 한복판에서 듣는 부산 사투리는 조금 부끄럽지만 또 든든했다. 누구도 저들을 속일 수 없겠군. 뼈도 못 추릴 거야.
이 든든한 지원군들 덕에 나는 무사히 첫 번째 방하나의 집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