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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06. 2022

길 잃고 헤매는 당신

관극일지 헤드윅

넌 외로운 세상 지친 영혼, 지지 말아 포기 말아
뮤지컬 헤드윅에서 구매한 MD와 티켓들

2021. 10.  2 ~ 16 선선하고도 추운 가을

뮤지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헤드윅. 조승우 배우님이 다시 헤드윅에 선다는 소식을 듣고 기왕이면 화끈하게 다 보자! 싶었으나 티켓팅에 실패했고, 기대감 없이 참전했던 마지막 티켓팅에서 무슨 운명처럼 표를 잡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자리는 저어어어어 뒤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표를 잡았고, 기왕이면 다른 헤드윅들도 보고 싶어서 오만석 배우님의 헤드윅을 한번, 이규형 배우님의 헤드윅을 두 번 보고 난 후 마지막으로 조승우 배우님의 헤드윅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공연에서 나는 울면서 극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뮤지컬 헤드윅을 보는 동안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스스로가 향하는 길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잘 사랑하는 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헤드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바로 ‘불안’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왜 불안을 느낄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생각이 기반이 되고 두려움이 되어 불안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확신일 수도 있고, 헤드윅의 경우 자신을 완벽하게 해 줄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헤드윅의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어린 시절 엄마가 헤드윅에게 들려준 이야기 ‘Origin of Love’에서 시작된다. 태초의 인간은 두 명의 사람이 하나의 사람으로 완벽한 존재였으나 이들의 저항을 두려워한 신들이 그들을 갈라놓았고 인간들은 이때 헤어진 짝을 삶을 살아가는 동안 찾아간다고. 이 이야기를 한 엄마는 그저 잠이 들어버린다. 그런데 헤드윅은 자신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이 헤어진 반쪽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버린다. 그리고 이어진 모든 이야기들은 헤드윅이 자신의 반쪽을 찾아 나선 상황에서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반쪽을 찾지 못하면 자신은 영원히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것만 같다는 그 불안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과정이 오히려 그를 더욱 무너지게 만들고 불완전하게 만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 자꾸 왼손에 있는 내 타투를 들여다보게 된다. 가장 불안감을 느끼던 순간, 이 불안의 바다 안에서 그대로 빠질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이 불안의 파도를 견뎌보자고, 이 거친 파도에 그저 잠시 나를 맡기어 보자고 생각하여 만든 타투였다. 불안을 주제로 하여 몇 가지의 도안을 받았고, 물방울 모양과 배 모양의 도안 두 가지를 각각 합치어 나만의 의미를 담은 타투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불안의 파도가 나를 잠식하려 할 때면 이 모양을 바라보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둬보자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약 헤드윅에게 이러한 지표 하나쯤이 있으면 어땠을까. 불안에 잡아먹히지 말라고, 만약 그 짝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완벽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어땠을까. 그저 헤드윅의 상처받은 마음을 슬쩍 지지해주는 모양새라도 갖춰줬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헤드윅의 삶은 그렇게 마치 줄타기를 하듯 불안하지는 않았으리라. 아마도 그래서 조승우가 연기하던 날의 헤드윅은 헤드윅의 엄마가 헤드윅을 떠나보내며 건넨 ‘행복하렴’이 한마디를 통해 남들과 다른 조드윅만의 헤드윅이 탄생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을 수 있게 해 준 것이 아닐까.


 반면 다른 헤드윅들은 어떤가. 내가 봤던 다른 두 명의 헤드윅 각각 오만석과 이규형이 연기한 두 헤드윅의 결말은 또 달랐다. 가끔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아 이제 저 언니는 스스로를 잘 추슬러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저대로 도로에 뛰어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츠학마저 떠나보내면 언니는 어떻게 살아가려고요’라는 생각이 드는 결말들이었다. 자신을 완벽하게 해 줄 짝을 찾지 못하고, 그리고 토미를 향한 원망마저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헤드윅은 오롯이 공허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그 극을 보는 내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움과 공격성이 빈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그 공허와 불안이 너무나 빤히 보이는 나머지 저절로 나도 모르게 그들을 향한 연민의 감정을 여실히 느끼고 만다. 그래서 마지막 넘버에서 이츠학에게 가발을 건네고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my dream my soul’로 시작하는 넘버는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다. 정말 이대로 헤드윅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든다.     


 아마 헤드윅이 가장 많은 불안을 느꼈던 이유는 존재로서의 가치에 대한 고뇌 때문이리라.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늘 찾아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 ‘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 ‘나’에 대해 찾아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나에 대해 아는 것 같다가 도 우리는 새로운 나를 찾고 발견한다. 문제는 동시에 우리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은 그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은 특별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가지는데 동시에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면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헤드윅에게는 그것이 더욱 그랬으리라.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짝을 찾아야만 하는 헤드윅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저 부유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는 더더욱 그랬으리라. 그래서 토미가 헤드윅에게 건네는 ‘이제는 받아들여봐요 당신의 존재 이유를’이라는 가사는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 직전에 신을 향해 외치던 ‘나는 당신의 실수였나요’라고 외치던 헤드윅의 모습이 떠올라서 더더욱 그렇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모르고 텅 빈 채 살아가던 헤드윅에게 토미의 이 마지막 말은 차오름과 동시에 공허함을 느끼게 했으리라. ‘너 자신으로 존재해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해주는 존재의 등장은 그 등장만으로 벅차오르고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상처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또 아프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늘 찾는다. 자신의 연인에게서, 자신의 자녀에게서 혹은 자신의 직업에게서. 그런데 스스로 오롯이 서있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과거부터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늘 있어왔다. 한자의 사람 인(人)은 두 명의 사람이 서로 기대 있는 모양새라고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에서만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오롯이 스스로의 가치를 믿고 이에 대해 생각할 때 내 옆에 있는 누군가와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기에 우리의 삶 속에 작별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흔하디 흔한 일이니 말이다.    


 ‘길 잃고 헤매는 당신, 따라와 나의 속삭임’ 이 극에서 헤드윅이 토미에게 그리고 토미에게 헤드윅에 건네는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토미 역할의 배우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헤드윅 역할의 배우가 토미의 역할까지 소화해낸다. 이츠학 역할의 배우를 남성으로 캐스팅해서 하는 것이 아닌 헤드윅이 곧 토미의 역할까지 소화하는 데에는 ‘따라와 나의 속삭임’이라는 가사가 강렬해지기 위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늘 길을 잃고 헤맨다. 그리고 우리는 그 헤매는 길을 인도해줄 누군가를 늘 찾는다. 하지만 결국 가만히 들어봐야 할 속삭임은 ‘나’의 것이 아닐까. 스스로가 오롯이 존재하여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말이다.


운명이 널 시험해도 힘들어하지 말고 헤쳐나가길, 대단한 너 헤드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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