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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h ahn Oct 10. 2019

당신이 열어주실 틈새에 관하여

개인스터디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도

당신이 열어주실

틈새를 믿었습니다


달콤하게 어리광부리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는

늘 행복했는지

행복했을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게

천수(天水)를 주시던 당신

삶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

-박경리(1926~2008)


 박경리 선생의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의 화자는 고난을 대처하는 방식이 낙관적이다. 신이 ‘나’를 위해 틈새를 준비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마음 속으로는 어린 아이들이나 할 법한 어리광을 부리기까지 한다. 이런 삶의 태도는 화자에게 ‘삶이 참 아름답다’고 느끼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당신이 열어 주실 틈새’가 전능한 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의 삶에서는 시련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행복 회로가 고장 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속초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어떤 아이를 만났다. 아이가 겪는 우연한 상황을 지켜보며 ‘당신이 열어 주실 틈새’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이는 제 발로 친아빠의 품을 떠나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작고 빨간 크로스 백을 맨 아이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버스 매표 직원은 아이가 저녁 늦게 혼자 버스를 타는 걸 의아해 했지만, 아이가 정당한 요금을 지불하자 표를 끊어주었다. 기다리는 동안 공중전화로 서울에 있는 친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이의 엄마는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와 아이는 한 버스를 탔다.


기사는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에 사고가 나서 설악산 한계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몇 번을 공지한 후에야 운행을 시작했다. 한참을 자다 버스가 너무 흔들려 일어났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경찰이었다. 기사는 난감해 하며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아이를 찾았다. 


 버스가 갑자기 멈추자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자 승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왜 출발하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승객도 있었고,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무슨 일인지 캐묻는 승객도 있었다. 아이는 계속 울면서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만 되뇌었다.


 경찰이 도착하자 버스 기사는 우는 아이와 함께 버스 밖으로 나갔다. 아이를 돕고자 하는 승객들도 함께 나가서 상황 설명을 들었다. 아이 아빠는 집에서 아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으며, 경찰은 아이가 혼자 서울행 버스를 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추적해왔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아이를 아빠에게 데려가려고 했지만, 아이는 격렬히 반항했다. 그 반응을 보고 아이 아버지가 정상이 아님을 직감한 승객들과 기사는 경찰을 제지하고 나섰다. “아이는 친엄마를 보고 싶어하니,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경찰이 공무집행방해를 제시하려고 하자, 버스 기사가 운송법상 손님은 목적지까지 데려다 줘야하기 때문에 서울에 가야한다고 했다. 경찰과 승객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또 다른 경찰이 서울에서 아이의 친엄마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다른 경찰은 자신을 따라오면 엄마를 먼저 만나게 해주겠다고 아이를 설득했다. 승객과 기사에게도 보호의 목적으로 데려가는 것이며, 절대 아이의 친아빠를 먼저 만나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이를 데려갔다.


  고작 10살짜리 아이가 혼자 서울행 버스를 타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아이는 그 마저도 감당할 수 있는 고통스런 현실에 내몰려 탈출을 계획했을 것이다. 경찰의 말처럼 나쁜 일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아이를 도운 것은 승객들과 기사로 대표되는게 선한 의지다. 그 의지들이 하나로 모여 한 아이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틈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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