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5/25 한국일보 작문
팩트는 나의 무기
언어 폭력은 실제 폭력보다 강할 수 있다는 주제의 포스터를 본 기억이 있다. 말풍선으로 상대를 때리고 있는 모습이어서 재미와 교훈을 모두 잡았다고 생각했다. 실제 폭력이 몸에 생채기를 남긴다면, 언어 폭력은 사람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언어 폭력은 욕설로만 이뤄진 줄 알았는데, 자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팩트 폭력은 언어 폭력보다 훨씬 강력했다. 팩트 폭력은 아주 작은 팩트라고 할지라도 원하는 만큼 분량을 할애하여 보도하는 방법으로 작용한다. 팩트 폭력으로 상대를 정신 못차리게 만드는 사이에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교묘히 등 뒤로 숨긴다.
다른 방법도 있다. 아주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는 방법이다. 상대가 숨기고 싶은 치부를 아주 큰 스피커로 여기저기 떠드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분위기가 싸해진다.
요즘 사람들은 팩트 폭력이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무기라고 착각하는 듯 하다. 정치인이 상대 진영을 공격할 때 통계 수치를 활용해 팩트 폭력을 일삼고, 문과 계열의 학생들을 조롱하기 위해 이과 학생들은 팩트 폭력을 내놓는다. 팩트 폭력은 정확한 수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고 패배에 승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해서 팩트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에 기반한다고 해서 팩트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은 결국 사회적 신뢰 자본을 무너뜨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승패로만 이뤄진 세상이 아니다.
팩트 폭력이 정치인들 사이에서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선거에 확실한 승패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상대와 최소 1표 이상 차이가 나야 자기가 살아남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 하에서 팩트폭력은 상당히 효율이 높은 수단이다. 어떤 국민들은 정치인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고 따라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선거법 개정안에서 석패율제가 유독 반가웠다. 세상이 승패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쉽게 패배한 사람도, 팩트에서 불리한 점이 있는 사람도 우리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된 것이다. 더 이상 팩트 폭력이 정치인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