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때는 반기고, 떠나갈 땐 놓아줄 수 있는 용기
4월의 글 쓰는 밤 - 두 번째 모임
두 번째 글쓰기 모임의 키워드는 '시절인연'이었다. 모든 것이 심란해지는 30대 초반의 마음에 조용한 위안을 건네는, 그리고 무엇보다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단어였다.
'시절인연'은 본래 불교 용어다. 모든 인연에는 그 '때'가 있고, 때가 되면 자연스레 인연이 찾아오며, 떠날 때 또한 그 시기를 따라간다는 뜻을 품고 있다. 거부하고 싶어도, 맞닿을 인연은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인연의 시작과 끝이 모두 자연의 섭리라는 점에서, 그 말 자체가 인생을 다독이는 주문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 삶의 '시절인연'은 무엇이었을까.
스쳐 지나간 사람들, 한때 몸담았던 일들, 오래 좋아했던 것들, 잠시 몰입했던 것들. 머릿속에 다양한 인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떠오른 건, 몇 년 전까지 이어졌던 요가였다.
그때 나는 요가를 정말 좋아했고, 앞으로도 평생 함께할 운동을 찾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2년이 흐른 지금, 나는 요가를 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때 배운 자세와 호흡은 여전히 다른 운동에 스며들어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요가는 여전히 나의 일부 같지만, 동시에 '시절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좀 더 솔직해진다면, 내가 몸담고 있는 출판계도 그럴 수 있다.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믿음이 흔들린 건 아니지만, 더 이상 확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땐 내가 이걸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구나."
"그건 싫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명제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볍게 했다.
시절인연이라는 개념이 나를 위로해 준 건, 그런 변화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후회나 미련 대신 '그때는 그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해지는 기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변화를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아주 좋아하더라도 언젠가는 덜 좋아지거나, 심지어 싫어질 수도 있다.
반대로 지금 너무 싫은 것도 언젠가는 덜 싫어지거나, 애틋해질 수도 있다.
사랑도, 미움도, 결국은 머물다 지나가는 감정일 뿐. 그래서 나는 확신을 내려놓기로 했다. 좋아함과 싫어함 사이 어딘가에서 충분히 흔들리기로 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 물건이든, 나의 취향이든.
그 대신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인연과 가능성을 위해, 내 감각을 넓히는 것.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탐색할 시간, 새로운 자극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체력과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가올 때는 반기고, 떠나갈 땐 놓아줄 수 있는 용기.
그러고 보니 두 번째 모임은 "한 주간 별일 없으셨어요?"라는 인사로 시작되었다.
나는 "별일을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에요"라는 나름 참신한 대답을 했고, 이야기는 곧 "재미있는 별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누군가는 돈이 필요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깊이 공감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일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해요."
아마 이 글쓰기 모임도 나에게는 그런 시절인연일 것이다. 감각적인 공간에서 좋은 음악을 듣고, 누군가 정성껏 준비한 간식을 나누며, 오감이 충만한 상태로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문득, 이곳에 오겠다고 문을 열고 나선 내 모습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시절인연'이라는 단어 하나만 있어도, 30대의 시간을 조금 더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