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간 새벽같이 출근하는 것치고 퇴근은 항상 늦는 바람에 근교의 산새 좋은 곳으로 눈을 돌릴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의 여유는 더없이 달콤했다.
몇 번 가본 경험이 없는 군산은 여전히 익숙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만큼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특별한 군산에 특별한 너와 함께 갔다.
계절에 적응한 풍경은 생각보다 더 겨울 같았다.
갑작스러운 드라이브에 구체적인 목적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우리는 군산의 어느 빵집에서 산 고로케와 단팥빵으로 가볍게 배를 채우며 스마트폰으로 갈 곳을 검색했다.
잠시 후 평소 한적한 곳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너와 나의 의견은 자연스럽게 은파공원으로 수렴됐다. 순식간에.
공원은 입구의 주차장부터 한산하다. 제대로 왔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은 호수는 고요했다. 바람 따라 일렁이는 잔잔한 물결은 쉴 새 없이 밀려들어 이윽고 내 마음까지 닿았는지 쿵쾅거리던 심장도 물결의 진동과 맞닿아 한층 잔잔해졌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오후 네 시,
띄엄띄엄 떠 있는 구름이 가라앉는 노란 해를 가릴 때면, 몇 갈래의 볕뉘가 호수에 닿으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켜켜이 깔린 찬 공기를 헤치며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언제나와 같이, 너와 함께 걷는 산책로는 곧 꽃길이 되었다.
걷다가 눈이 마주치면 웃는다, 네 얼굴이 예뻐서.
걷다가 손을 잡으며 웃는다, 네 마음이 따듯해서.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나무가 겨울의 색채와 참 잘 어울린다. 나는 그 앞에서 멈춰 선다.
‘H, 사진 한 컷 부탁해.’
눈빛만 봐도 내 마음을 유리알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넌, 곧바로 핸드폰을 꺼낸다.
그렇게 우리의 추억은 하나 더 저장된다. 영구히.
호수를 가로지른 큰 다리 위를 지날 땐
저 멀리 산 뒤로 뉘엿뉘엿 지는 해가 샛노랗게 타고 있다. 걸음을 멈춘 넌 타는 해가 뿌려 대는 색채를 감상하고, 샛노란 해는 그런 널 보고 있다.
나도 그런 널 지그시 바라본다. 아, 사랑스럽다.
겨울이 만든 색채에 휘감긴 넌 사랑의 여신 비너스보다 아름다웠다.
나는 버릇처럼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너의 모습은 하나 더 저장된다. 영구히.
해가 산 뒤로 완벽히 숨자 온전한 겨울이 우리의 몸을 덮친다. 살짝 춥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욱 꼬옥 잡는다. 너의 온기가 좋다.
겨울의 짙은 회색빛은 앙상한 갈색 나뭇가지를 거무스름하게 덧칠하고, 잔잔한 물결 위에 빛나던 작은 별들이 떠난 자리를 어둡게 메웠다.
자, 이제 꺼내 놓을 시간이다. 저도 모르게 가슴 밑절미에 쌓여있던 묵은 감정들을 게워 낼 시간이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에게 차마 하지 못 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차분하고 엄숙하게.
묵혀 두었던 소회를 밝힐수록 내 가슴의 밑절미도 밝아지더라. 너도 그랬으리라.
침이 마르도록 말을 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지금 다 게워내 버리고 그 빈자리마저도 사랑으로 채우고 싶었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책로는 10여 킬로미터나 되었지만 나에겐 그 거리가 턱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저 멀리 산책로의 끝이 보이자 초조해졌다. 나는 걷는 속도를 최대한 늦췄지만 한 걸음을 10미터씩 내딛는 기분이랄까, 느린 걸음이지만 전력질주보다 빠르게 느껴졌다. 속도를 줄이는 것으론 갈수록 빠르게 다가오는 산책로 출구를 밀어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눈으로 길을 길게 늘어뜨려 보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아직, 이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마음으로.
하지만 애석하게도 산책로 출구는 금방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 가야하나...’
.
.
.
.
.
.
‘아니야... 이대로 갈 순 없어.’
오후 여섯 시,
산 뒤로 숨어버린 해의 여운까지 스러져버린 하늘은 내 얼굴에 어둠을 드리웠고, 나는 그 틈을 타 어둠 뒤에 숨은 채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우리 저기로 조금 더 걸을까?”
내가 비슷한 말을 할 거란 걸 미리 알고 있었을까, 넌 곧바로 답을 해주었다.
“그래.”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더 걸었다
우리 사이를 오간 진솔한 이야기는,
사랑을 속삭이며 시작한 대화는,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을 선물했다.
그날은 저물었지만
그날의 음성은
티끌만큼도 흩어지지 않은 채
내 기억 속에 온전히 보관될 것이다.
Photo by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