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열세 살이던 나는 집이 이사를 하게 되어 시골에서 광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더 이상 매일 가던 연습장을 가지 못하게 되리라는 불안한 생각도 현실이 되었다. 내게 골프 연습장은 꿈을 키우던 곳이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달달한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현실을 직시하고 꿈을 접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데에는 이사한 집도 한몫 했으리라.
이사한 집은 새로 다니게 될 초등학교 후문의 사거리에 위치한 중국집 위층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폭이 60센티 정도밖에 되지 않아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벅찼다. 대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볼품없이 녹슨 한 짝짜리 철문은 휘어서 잘 닫히지도 않았다. 색바람에도 쉴 새 없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내는 둔탁한 소리는 하염없이 초라했다. 나는 그 문이 싫었다.
집은 너무나도 차갑고 좁아서 거실이라고 하기에는 한없이 민망한 두 평 남짓한 공간과 두 칸의 방 그리고 그 두 개의 방 사이에 끼워 놓은 듯한 비좁은 주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화장실은 세탁기를 들이면 한 명이 겨우 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천방지축 삼형제를 비롯한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턱없이 좁은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이 싫었다.
허구한날 중국집에서 올라오는 기름진 냄새는 삼형제의 식욕을 돋우어 놓았다. 나는 그때마다 막냇동생을 호출하여 시켰다. "막둥아, 엄마한테 가서 짜장면 시켜 달라고 해봐." 물론 성공확률은 반도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아 둔 고구마튀김과 말린 고구마였다. 하지만 매번 실망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고구마튀김과 말린 고구마가 늘 맛있었으니까.
스물일곱 살인 나는 가끔 그때를 생각한다. 신기하게도 떠올릴 때마다 새롭다. 지금의 나는 고구마를 튀기시고 말리시던 그때의 어머니의 미어지는 가슴을 손으로 만져지는 것 같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우리에겐 달달했던 고구마가 어머니는 얼마나 싫었을까.
그 뒤로 10년간 우리는 광주에서 두 번의 이사를 더 했다. 그동안 어머니의 삼교대 공장 생활도 끝이 없을 것처럼 계속 되었다. 광주에 올라와 대출을 받아 큰마음 먹고 사셨던 출퇴근용 소형차인 베르나도 어머니와 함께 늙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보다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던 어머니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우리 가족은 좋은 기회를 얻어 다른 지역으로 터를 옮겼고, 그 후로는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광주에서의 10여년간의 생활을 뒤로하며 어머니께서는 한마디 하셨다.
"내게 남은 건 딱 베르나뿐이구나."
어머니께서는 지나가는 말로 하셨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한마디엔 어머니가 그동안 느꼈을 서러움과 아픔의 대부분이 응축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늘 그렇듯 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빠르면 수일에서 느리면 수십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내 마음과 만난다.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어머니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만날 때까지의 기간이 점차 줄었으면 좋겠다.
늦지 않게 알아 차려야 더 많은 효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사랑합니다, 어머니.
Photo by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