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UP'. 어떻게 읽어야 할까? 대부분 '셋업'이라 읽으리라 예상된다. 구성, 설치, 장치 등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컴퓨터를 어느 정도 해본 사람들은 익숙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잘 모르는 나 역시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스쳐 지나가듯 setup 파일은 몇 번은 본 기억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이 단어를 '셋업'이라 부르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 그녀는 나에게 이 단어를 '에스, 이, 티, 유, 피'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방과 후 친구와 집으로 와 컴퓨터 게임을 하려고 했다. 게임 시작을 눌렀다. 분명 소리는 들리는데 모니터가 까맣게 된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조금 있으면 엄마가 올 것이고 그 순간 게임은 종료될 게 분명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기특한 게 그 길로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상담원과 연결되고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게임을 켰는데요, 모니터가 까매요!" 지금 돌이켜보면 알아들은 상담원이 신기하다. 내컴퓨터 파일로 들어가서 또 어디로 들어가고.. 마지막 말이 이거였다. "에스이티유피라고 적힌 파일 실행해서 진행하면 돼요." 나는 곧장 친구에게 소리쳤다. "에스이티유피래!"
요즘에야 영어 유치원이다 뭐다 해서 영어를 아주 어릴 때부터 가르치지만 내 초등학교 당시는 영어는 적어도 초등학교 5, 6학년은 되어야 학교에서 아주 기초적인 부분을 배웠다. 그전에 영어는 알파벳,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정도만 알 수 있게 빨간펜, 씽크빅 같은 학습지를 통해 apple, milk 수준의 단어를 배웠다. 그러니 내가 'setup'이란 단어를 알리 만무했다. 상담원도 그 단어를 몰랐을까? 그럴 리 있나. 그녀는 오히려 에스이티유피보단 셋업이라 말하는 게 더 경제적이고 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에게 에스이티유피라 말했다. 이제야 느꼈다. 그녀가 나한테 해준 그 말은 단순히 상담이 아니라 배려였다는 걸. 그게 뭐 별 거냐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스스로 초등학교 2학년이 되기로 자처했다. 나의 눈으로 그 파일명을 읽어주었다. 배려는 이렇게 별 것도 아니게 내가 그가 됨에서 시작되었다.
배려, 사실 어렵다. 대단한 걸 해줘야 할 것 같고 지레 포기한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지금 내가 누가 되고 또 누굴 생각해주는가 피곤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꼭 거창한 배려만이 배려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상담원은 자신이 나에게 배려를 해줬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사소한 부분에서 내가 그가 되었을 때, 내겐 아주 작은 배려였지만 그에겐 잊지 못할 감사함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마치 내겐 1분 남짓한 상담전화가 가슴 한편에 간직되어 퍽퍽한 삶 중에 떠올리면 여전히 온기로 남아있는 추억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