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헬스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늘 끈질기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운동은 몇 주를 못 가 멈추고, 책은 읽다 덮은 채 책장에 쌓이고, 글쓰기는 몇 줄로 끝난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비난한다.
"왜 나는 이렇게 꾸준하지 못할까?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나는 얄팍한 사람이 아닐까?"
변덕스러움은 마치 나의 약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자책 속에서도 나는 또다시 운동화를 신고, 책을 펼치며, 연필을 든다. 어쩌면 나의 변덕스러움은 약점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헬스장을 들어서면 코끝을 스치는 철제 기구의 냄새와 사람들의 숨이 섞인 공기가 낯설지 않다. 바벨을 들어 올릴 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거친 쇠의 질감,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는 느낌이 몸을 깨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내 안의 게으름은 자리를 잃는다. 운동이 끝난 후 마사지를 하면, 딱딱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린다. 따뜻한 물줄기가 땀과 피로를 씻어낼 때, 그 순간만큼은 완전해진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런 날도 오래가지 않는다. 몇 주 뒤, 운동복은 서랍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의 의욕은 또다시 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나 헬스장을 떠난 날, 나는 책장으로 향한다.
책을 펼치면 종이의 냄새가 먼저 코를 간지럽힌다. 첫 페이지를 읽을 때는 마치 모르는 세계의 문턱에 서 있는 기분이다. 흰 배경과 검은 기호들이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어린 왕자와 데미안이다.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단순히 아름다운 동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에 걸쳐 다시 읽을 때, '길들임'이라는 말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길들임이라는 건, 상대방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는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무언가를 들춰내는 듯했다. 그러나 독서의 몰입은 항상 이어지지 않는다. 몇 페이지를 읽다 보면 스마트폰의 알람이 울리고, 그 순간 책은 덮인 채로 남는다. 하지만 생각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걸 글로 남기고 싶다.' 그러면 나는 연필을 든다.
글쓰기는 내 생각을 기록하는 가장 솔직한 도구다. 처음에는 브레인스토밍하듯 마구잡이로 적는다. 단어들이 자유롭게 흘러가며 무질서 속에서 나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막상 다시 들여다보면, 흩어진 단어들은 조잡하고 엉성하다. 나는 다시 형식을 잡고 문장을 다듬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고되고 귀찮다. "그냥 여기서 멈춰버릴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스쳐간다. 그러나 글쓰기는 나를 멈추게 두지 않는다. 운동에서 느낀 움직임과 활력, 책에서 얻은 깨달음이 글 속에 녹아들고, 나의 생각은 조금씩 더 명료해진다. 글이 완성될 때쯤 나는 마치 무언가를 정복한 듯한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글쓰기 역시 항상 끝맺는 건 아니다. 미완의 초고는 내 노트 속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연필을 집어든다. 글은 언제나 나를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변덕스러움, 나의 양면성. 나는 변덕스럽다. 운동화를 신었다가, 책을 펼쳤다가, 연필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한때 이 변덕스러움이 나를 얄팍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나는 스스로를 자책했고, 꾸준함이란 미덕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이 변덕은 나의 개성이고,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다. 나는 변덕스러움 덕분에 다양한 것을 배우고, 새로운 환경에서도 빠르게 적응한다. 헬스에서 내 몸의 가능성을 느끼고, 독서에서 깊이를 배웠으며, 글쓰기를 통해 나를 성찰했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덕스럽게 움직인 나로 인해 가능했다.
멈추더라도, 다시 시작한다 운동, 독서, 글쓰기. 이 세 가지는 나의 변덕스러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다. 멈추고, 다시 시작하고, 또 멈추고 돌아오더라도, 그 모든 과정이 결국 나를 만든다. 오늘도 나는 헬스장에서 몸을 깨우고, 어린 왕자의 책장을 넘기며 마음을 열고, 연필을 들어 내 생각을 기록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멈추더라도,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