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왼손에 쥐고 칼로 그것을 깎아내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 행위가 내게 무슨 생산성을 줄까?"
연필 깎이라는 도구는 연필 깎기를 쓸모없는 행위로 바꿨다. 이 시간은 내 삶에 조금의 생산성도 더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삶이란 정말 생산성으로 평가될 수 있는 어떤 것일까?
생산적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을 타인과 교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치를 느낀다. 직장에서의 업무, 사업 아이디어, 더 나아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결과물들은 우리가 사회 안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생산적인 일들은 흔히 그 교환 가능성을 통해 우리의 삶에 실질적 쓸모를 부여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연필로 종이에 적어 내려간 무의미한 낙서나, 뜬금없이 흩어진 단어들은 생산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것들은 나만의 흔적이다. 누구에게도 무가치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것들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의 집합이다.
나를 이루는 것들은 무엇인가? 생산적이지 않은 행위. 교환 불가능한 기억. 타인의 기준으로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물건. 오히려 그런 것들이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산책길에서 느낀 바람. 연필로 써 내려간 문장. 목적 없이 흘려보낸 시간. 그것들은 교환의 영역을 넘어선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타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사소한 흔적들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생각해보면 삶은 교환 가능성을 넘어선 곳에 진정한 가치를 두고 있다.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주고받은 웃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눈 고요한 시간. 좋아하는 시 한 줄.
연필을 손에 쥐고 있는 지금, 나는 다시금 확신한다.
우리는 교환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루는 것은 교환 불가능한 것들이다.
종이에 남겨진 연필의 흔적처럼, 나의 삶 역시 누군가에게는 쉽게 지워질 수 있는 무의미한 시간의 축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흔적이야말로 고유한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