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함의 치료제
미래는 불확실하여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결국에는'이다. 결국에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 결국에는 모든 국가는 멸망한다. 결국에는 모든 인연은 작별한다. 인생 전체에 걸친 불확실함은 한 단어로 종말을 맞이한다. 종교를 믿는다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내세를 믿지 않는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다. 이것은 절망적으로 들린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사라지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과 작별한다. 기쁨이 있었다면 그것을 반드시 상실하고, 언젠가 세상은 애초에 없던 것이 된다. 이 글은 허무해 보이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시작은 끝을 보장한다. 시작된 것은 반드시 끝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죽음의 순간에 태어남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작과 끝을 잇는 불교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원회귀'라는 개념 자체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가치있는 아이디어이다. 나의 탄생으로 세계가 시작되고, 나의 죽음으로 세계가 끝나는 관점에서는 나의 인생은 영원의 가치를 가진다. 이 관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듯,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남녀가 결혼한다면, 그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제안을 더 해보겠다. 우리에게 시작할 자유가 있음이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고통까지도 언젠가 침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기쁨도 영원할 수 없지만, 어떤 슬픔도 영원하지 못한다. 결과가 파멸뿐인 세상이라면 가치있는 것은 과정이다. 결말이 정해진 소설은 결말을 향한 여정에서 고유성이 드러난다. 오히려 결말이 정해진 세계이기에 과정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력해도 실패하고, 착하게 살아도 벌을 받는 세상이다. 이곳에서 노력한다는 것은, 착하게 산다는 것은 성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벌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노력과 착하게 사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끝남이 결정된 세계에서 시작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가치 있음이다.
한 가지 희망을 던지고 싶다. 어떤 시작은 죽음에서야 침몰한다. 나는 이것을 '엔딩 크레딧'이라고 부른다. 그 순간 나는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으며, 삶에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으며, 시작하지 않음을 후회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언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순간 내가 소망하는 바대로 살아가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삶에 부끄러움 없이, 마음껏 시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찾은 유한함의 해독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