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이란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운명은 필연성을 의미한다. 예언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 예언을 실현시킨 오이디푸스처럼 만약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행동은 무의미하다. 운명을 믿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관점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적 관점이다. 세상은 신이 창조한 '최선의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반드시 '최선의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운명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반드시 좋아지겠지.' 이것이 기독교의 운명론이다. 비슷하게 스토아적 운명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는 배우이고, 세상은 하나의 연극이다. 배우는 줄거리를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연기할 뿐이다.
이러한 운명론에 반대하여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주장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그의 말은 미래를 개척하는 인간의 태도를 담고 있다. 실존이란 간단히 말하면 결정되지 않은 것들이다. 사르트르의 말은 미지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선택이 운명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 함의를 담는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상관없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것'은 없는 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 실존주의를 극단적으로 해석한다면 사회적 불평등, 구조적 비극 등 공동체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게 된다. 이미 정해진 것이 없고, 자신의 선택으로 구성되는 세상이라면 삶의 모든 고통은 자신이 결정한 것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명이 존재한다는 운명론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존주의의 양자택일에서 무엇을 선택하든 희생해야 한다. 운명론의 관점에서는 선택은 없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없다. 반면 실존주의에서는 자유는 있지만 모든 것을 책임져야한다. 조금 극단적이지만 어떤 사람이 200m높이에서 떨어진다고 해보자.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라면 이 사람은 살아날 방법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가 죽는다면 살아날 방법을 찾지 못한 본인의 잘못이 된다. 반면 운명론적 세계관이라면 그의 죽음은 어차피 그리되었을 운명이다. 기독교적 관점이라면 그 또한 신의 계획 안에 포함된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에 전통적 운명론과 실존주의가 놓친 '불확실성'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벽한 결정과 완벽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확률적 가능성이 있는 세계이다. 앞선 예시로 비유하자면 200m에서 떨어지는 남자는 죽을 확률이 결정되어 있고, 책임도 그에 맞게 변동해야 한다. 살 확률이 0.1%라면 그것을 해내지 못했을 때 책임을 0.1%만 감당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률은 모든 결정과 현상에 적용된다. 이러한 확률적 운명론은 우리가 모든 걸 다 책임지지도, 운명에 무조건 굴복하지도 않도록 한다. 그래서 마땅히 해야할 일은 좋은 선택을 할 확률을 아주 조금 높이는 것이다. 더 좋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과정'과 '성장'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