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주체는 누구일까?
시간은 유동적이다. 끊임없이 흐르며 과거를 생산해낸다. 시간은 양가적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때로는 행복을, 때로는 고통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타의적'이다. 시간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속성을 맡긴다.
자본의 급격한 발달은 시간의 타의성을 이용하여,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들마저 타의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즉, 시간을 재화로 삼아 사람들을 시간의 굴레 속으로 호출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바쁘다. 어렸을 때부터 짜인채로 주어지는 시간의 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타의적인 시간을 사용자의 '자의'로 사용하지 못한다. 자의적이지 못한 시간은 그의 속성과 무관하게 고통을 낳는다.
현대인은 어릴 때부터 타의적인 시간 사용에 익숙해진다. 즉 가장 기본적인 자기 결정권을 거세당한 채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한 개인이 '교육'이라는 사회단계에 접어들면 타의적 시간 사용은 더욱 심화된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경험하지도 못한 '미래'라는 달콤한 굴비를 늘 눈 앞에 두고 바라만 본다. 상상만 한다.
어느 순간(개인마다 편차가 존재할 것이므로)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했던 타의의 시간이 이제는 나의 것으로 돌아온다. 내 시간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내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꾸려나가야 한다. 예전부터 너무나도 많이, 자주 시간은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래서 시간을 헛되이 사용하는 것이 두렵다. 나에게 짜여진 틀의 시간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아서 불안하다. '결정장애 세대'와 같은 말은 이런 데서 파생한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다시 내 시간을 어딘가에 반납한다. 나를 관리해주는 학원에,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긴다. 고통스럽지만 너무나도 익숙해진 '눈 앞의 미래라는 굴비'라는 환상을 믿고 싶어진다. 결국 시간을 자의로 사용해보지 못한 개인들은 너무나 당연한 시간이라는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시간은 자본의 소유로 인한 계급과 무관하게 대다수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모두가 바쁘다. 자본이 없는 개인들은 자본을 많이 소유한 개인들의 삶의 방식, 즉 시간 사용 매뉴얼을 익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자의는 버려진다.
이러한 속성은 근대성의 산물일까? 나의 행복을 위한 시간사용. 주어진 틀이 아니라, 내 시간을 내가 사용할 줄 아는 사용자의 자의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바쁨과 쉼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그러나 강요되어지는 바쁨은 분명한 타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