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가 강타 오빠 무릎에 누워서 같이 기차를 타고 갔어!"
초등학교 저학년, 나를 깨우러 온 엄마에게 이 생생한 꿈을 흥분한 채 얘기했다.
어이없어 웃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난다. 만약 내 딸이 그랬다면 나 또한 웃음밖에 안 나올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연예인, 가수, tv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쭉 거슬러 올라가면 8살 때인지 김건모와 박진영 중 누가 좋으냐며 집 앞 놀이터 철봉에서 친구와 이야기 나눈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은 엄마와 함께 모래시계를 보고 있었는데 뒤늦게 귀가한 아빠가 못 보게 하는 바람에 이불 속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도.
그 조그만 게 뭘 안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가수들을 떠올려본다. H.O.T., 신화, god, SES, 핑클...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달에 한 번 반에서 장기자랑을 하면 친구들과 핑클, SES, 샤크라가 되어 춤을 췄다. 아직도 그 시절 노래들이 나오면 자연스레 몸이 기억한다. 어제 저녁은 뭘 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핑클을 할 때면 누가 성유리를 하냐, 이진을 하냐 은근한 신경전이 있었다. 나는 "아무나 상관없어~"라고 쿨한 척을 했지만 성유리를 하고 싶었다.
카세트테이프에 공테이프를 넣고 친구와 함께 가요 프로그램 진행자와 가수가 되어 녹음을 하며 우리끼리 이름 붙인 '가수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가수들의 테이프와 CD들을 사 모았다. 엄마와 장을 보러 갈 때 난 음반 코너에서 구경하며 엄마를 기다렸고, 엄마가 오면 눈치를 보며 장바구니에 쏙 집어넣곤 했다. 그렇게 음반을 사면 가사집을 보고 음악을 듣고, 예쁜 언니들과 멋진 오빠들의 사진을 보며 동경에 차있었던 시절이었다.
본격적으로 덕질이라고 부를만한 것의 시작은 H.O.T.였다.
High-five Of Teenagers.
H.O.T.는 대문자로 써야 하며 철자 사이에 점을 꼭 3개 찍어야 한다는 이 철칙은 여전히 나를 옭아매 지금도 귀찮아도 caps lock을 누르며 대문자로, 점 3개를 꼬박 쓰고 있다.
한 가수의 진득한 팬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god 육아일기를 볼 때면 정말 많이 흔들렸다. 잘생긴 신화 오빠들의 top와 의자춤은 또 한 번 나를 흔들었고, 꽃미남 밴드 클릭비의 백전무패도.
수많은 유혹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난 끝까지 '희준뷘'으로서 지조를 지켰다. 어렸기에 팬클럽을 들 수도, 콘서트를 갈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친구들 중 언니가 H.O.T. 팬인 아이들에게 정보를 얻을 뿐이고, 브로마이드를 모으고, 음반을 사고, 가사집을 외우는 정도였다. 내 방 작은 붙박이장에는 브로마이드들이 가득 있었다. 그곳은 내 보물창고였다.
그러던 어느 날 H.O.T.의 해체 소식이 들렸다. 슬프긴 했지만 생각보다 덤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즈음 드림콘서트를 가게 됐고 하얀색 풍선을 들고 가 조용히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 후, tv에서 방영된 jtl 게릴라 콘서트를 보며 친구와 함께 엉엉 울었다. 그간의 복잡했던 감정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ㅋㅋㅋ'를 너무 많이 붙이고 싶다.)
흑역사는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희준뷘으로서 그의 롹 스피릿을 존중했고, 의무감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렬히 좋아했고, 응원했다. 다행히 강타의 솔로 앨범은 취향에 맞아 마음 깊이 좋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덕질은 일단락됐으나 고등학생이 되고 장우혁이 솔로로 나오면서 다시 발동이 걸렸다. 드디어 제대로 덕질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윗옷을 벗어버린 근육질의 몸이 드러난 은빛 앨범 재킷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교에서 온종일 머릿속에 장우혁이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함께 좋아하던 친구가 있어 맞장구를 쳐주니 더 난리가 났다. 우리는 라디오와 방송 일정을 공유하며 찾아 들었고, 소풍이 끝나고 장우혁이 출연한 예능에 방청권 신청으로 처음으로 방송국도 찾아갔다. 그 해 겨울엔 학원을 빠지고 피시방에서 티켓팅을 성공한 후 장우혁의 첫 솔로 콘서트를 갔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는 인생 처음이었기에 황홀했으며, 짜릿한 경험이었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그랬다. 인생에서 중요한 과제는 자기의 다양한 자아를 통합하는 것이라고. 과거의 나도 타인이며, 과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H.O.T.는 내 어린 시절 그 자체였다. 기억 저편에 있던 나의 부끄러움을 꺼내보며 과거의 나를 애써 이해해본다. 그 시절 나의 열정에도 박수를 보내며.
고이 숨기고 싶은 시절이긴 하나, 이 또한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그 때의 나를 나름 귀엽게 여겨보며 희준뷘에게 인사를 건낸다.
행복했으면 됐다. 잘있어, 희준뷘.
#초딩의덕질
#덕질의역사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