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 한강 | 나의 '흰'

by 에이프릴맘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책을 여는 첫 문장이다.


문,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 도시, 하얀 젖, 초, 성에, 파도, 서리, 눈, 진눈깨비 ...


그녀는 온갖 흰 것에 대해 썼다. 이 세계의 흰 것들을 그녀의 언어를 통해 하나하나 마주했다. '하얀 것'과 '흰 것'은 다른 것이었고, 흰 것'은 시리고 아픈 것이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스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작가의 말-





작가의 어머니는 실제로 어린 나이에 혼자, 갑작스럽게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2시간을 살았다. 그렇게 언니가 될 뻔 했던 그 언니에게, 히틀러가 절멸을 지시하여 파괴했던- 부서진 흰 석조건물들의 잔해들로 하얗게 보인 그 도시에서 작가는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흰 것'들이 그토록 아프고 시리게 다가왔나보다.


온 몸의 감각으로 읽어내려가며 나도 자꾸 하얀 것을, 흰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짧게나마 나만의 『흰』을 써보고 싶어졌다.







어금니


핸드폰 후레시를 켜고 아이의 입을 들여다 보았다. 오른쪽 어금니 자리에 선홍빛 잇몸을 뚫고 크기가 다른 하얀 점 두 개가 올라와 있었다. 그 여린 살을 찢고 올라와야만 했을 것이다. 무른 것만 먹을 수 없기에, 제법 거친 것을 자기 힘으로 씹어 삼켜야 하기에. 그래서 요 몇일 밤을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렇게 뚫고 올라온 그 하얀 이는 이제 아이의 입속에서 가장 크고 단단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그 무언갈 가장 먼저 만나 잘게 부숴 소화의 첫 단계를 성실히도 해내겠지.



이토록 작은 너에게도 이제는 그런 힘이 생기겠구나, 단단해지겠구나.

때론 어금니의 저작힘으로도 안되는 그 무언가가 언제든 네 인생에 들어와

퉤퉤 뱉어내기도, 잘근잘근 씹어 보기도, 안되면 그냥 삼키기도 하겠구나.

혹여 네 목에 걸려 콜록될까, 잘못되기라도 할까.

지금처럼 닳고 닳은 내 어금니로 잘게 부숴 네 입에 넣어주고 싶은데.


그렇게 아이는 또 나 몰래 커버렸다.






눈 온 아침



밤새 내린 눈을 보러 이른 아침 문을 열었더니

그토록 하얗게 눈으로 뒤덮여 고요하게 반짝이는 세계가.



눈부심 하나하나 수백수천만이 모인

그 하얗고 성근 두꺼운 이불 위에 나의 첫 발자국을 꾸욱 새겨본다.



마치 우주로 가 아무도 닿지 않은 달에

발을 내딛듯 숭고함과 경이감으로

한 발 한 발

내 흔적을 남긴다.



고 차가운 게 내 발을 따스히 감싼다

나는 밟았는데, 눈은 나를 안는다.



아, 이 기분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즈



너의 상처 위로 흰 거즈를 덧댄다

그 여린 살결에 무참히도 패여나간 자국이

그 자리엔 묵직한 피가

서슬퍼런 것이 흐른다



흰 거즈를 한 겹 한 겹 두르며 덧댄다

검붉은 피가 한 겹에는 이만큼

또 다음 한겹에는 그보다 조금

또 그 다음 한겹에는 그보다 더 작게

자취를 감춘다



하얀 것이 빨간 것을 덮는다

칠해질 줄만 알았지, 내어줄줄만 알았지,

없애기도 하는구나

그 얇디 얇은 하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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