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한강 소설 | 그 여자와 그 남자

by 에이프릴맘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분명하게 전달되는 문장이 아닌 시나 소설은 읽기가 어려웠는데 요즘은 자꾸 손이 간다. 도서관에서 작가 한강의 소설 두 권을 집어 들었다. 그중 하나가 『희랍어 시간』이다. 나의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어려워 시간이 꽤나 들었다. 여러 번을 쓰고 지우며, 기록을 남긴다.



말을 할 수 없는 여자와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감각적으로, 한강 작가답게 그려낸다. 단순히 감각적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어둠, 죽음, 소멸, 시간, 사랑-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두 인물이 느끼고 말하는 것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였다. 나의 하찮은 공감으로나마 그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 여자.



여자는 마치 죽은 사람 같다. 그녀의 침묵은 산 사람이 가진 침묵이 아니었다고 남자는 그녀를 묘사했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이 굽었고, 손톱들이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있다. 그녀에게 언어란 마치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는 것'이었다. 그녀의 언어는 17살에 한 번, 20년 후에 또 한 번 사라지게 된다. 20년 전에 잃었던 언어는 낯선 언어인 프랑스어 한 단어를 우연히 발음하며 찾게 됐고, 이번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기 위해 희랍어를 배우는 중이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말이 없다는 것은 감정들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으며, 지워지면서, 번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여의고, 남편과 이혼을 하고,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지만 그녀는 결국 세상과 단절하는 침묵을 택한다.

언어는 접촉이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이 접촉해야 하며 공기를 통해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녀는 그 무엇과도 접촉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것처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 방법인 '시선'으로만 세계와 접촉한다. 하지만 바라만 본다는 것은 결국 지워지게 된다. 분명할 수 없다. 그녀는 그녀를 괴롭히는 것들이 파편인 채 흩어져 분명해지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한 여자가 땅에 누워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들이 지어준 그녀의 인디언식 이름은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이다.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고 말겠다는 눈의 고요한 외침이 '펄펄'에 함축되어 눈물처럼 내린다. 응축된 슬픔과 고통이 그녀의 희랍어 시에도 나타난다. 한 여자가 땅에 누워있는데 목구멍에 눈이, 눈두덩에는 흙이 있다. 눈과 흙의 차가운 질감의 것이 입과 눈을 가린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있다. 그녀에게 어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관계의 무력함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녀 앞에 멈춰있길 바라는 그녀의 마음일까.






그 남자.



어스름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며, 그의 상태를 독자에게 확인시킨다. 그는 완전히 시력을 잃기 전, 어스름한 상태로, 약간의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있는 호시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다. (호시는 해가 뜨기 직전, 해진 직후의 어스름한 시간을 뜻한다.) 이 어둡고 불확실한 시간은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 그의 심리와도 맞닿아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단순하게 눈이 보이지 않으면 청각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그의 얘기가 가슴 깊이 기억에 남는다.

거대하고 불투명한 시간의 양감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마흔이 되면 완전히 시력을 잃는다는 의사의 말에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에게 얼마나 가혹했을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얼마나 압도되었을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시력을 잃어가는 두려움에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죽음은 언제나 그와 가까이 있었다. 그는 '죽은 언어'를 가르치는 희랍어 강사이다. 플라톤이 구사했던, 희랍 국가들의 쇠망과 함께 없어진 그 언어를 가르친다. 소멸과 죽음의 이데아를 말하는 그에게 '조금의 빛이라도 없다면 이데아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요하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요하임의 사망 소식은 그에게 또 죽음을 상기시킨다.



어릴 때부터 늘 죽음과 삶의 경계를 왔다 갔다 했던 요하임은 '한순간 쏘아져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을, 그 안에서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을 맨손으로 만지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다른 세계가 아닌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가 자란 병실이 아닌 세상 밖은 그토록 강렬하고 아름다웠으리라.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p.123-124)


이 후회가 그녀에게까지 닿아, 그는 그녀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일까.

껴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몸과 몸이 만나 포개어 안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힘이다. 너와 나의 미묘한 경계를 부수고, 널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니까. 작은 용기가 필요할 순 있겠으나 그것은 결코 나를 해치지도, 내가 무너지는 행위도 아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사는 것이다. 그 연약한 몸을, 연약한 몸이 감싸안아 온기를 나눔으로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힘을 서로가 나눠 갖는다.

나도 살기 위해 그리고 살리기 위해 무엇을 끌어안아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그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희랍어 시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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