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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z Aug 14. 2018

일상이 인생

살아가는 매 순간이 곧 인생이었다.



일상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을 처음 그려보기 시작할 때였다. 무엇을 그려나가야 할지 몰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죄다 그려댔다. 흩날리는 영수증, 양말 한 짝, 유리잔에 투과되는 빛과 그림자 같은 것.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이를 가만히 지켜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신기하게도 나름의 생각들이 떠올랐다. 애초에 큰 의미를 얻고자 본 것도, 평소에 신경을 쓰던 것들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투명한 유리잔에 투과되는 빛



 예를 들면, 입장권을 보며 용기나 도전에 대해서 생각한다든지, 영수증을 보며 추억을 되새기는 방법을 정리했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보며 왜 이 빛을 사랑했었는지 이유를 찾기도 했다. 처음에는 뭘 이런 사사로운 것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나, 싶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의미가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사사로운 것 자체가 주는 의미이든, 나의 경험에서 떠오르는 의미이든. 하루하루 눈 앞에 있는 일만 해치우며 살다가, 앞 날만 걱정하며 살다가, 비로소 일상을 느끼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 번도 제대로 일상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사실 별로 느껴볼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 더 알맞을 것이다. 딱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눈에 들어온 일상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는 곧 기억에 새겨진다. 이 부분이 바로 일상을 느껴야 하는 이유일 테다. 무의미할 수 있었던 존재들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의미를 지님'은 곧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가치가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쉽게 버릴 수 없으며, 소중하다. 만나게 되는 모든 일상에 가치가 있다면,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뜻이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존재(存在)'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철학적 또는 과학적 같은 그런 학문적 의미로서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있는(有) 것'에 대해 있는 대로의 모습을 부정하지 않고 말해주는 단어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모든 일상도 '존재'하길 바란다.




'지금 여기(here and now)'



 갑작스럽게 심리학 이야기를 할 텐데, 놀랍게도 내가 심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심리 치료 중 '인간 중심 치료'라는 이론이 있다. 학부 시절 공부한 전공이론 중에서는 가장 크게 인상이 남은 듯하다. 이 이론의 치료기법 중 하나는 '즉시성(immediacy)'인데, 즉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전달되는 즉시적인 경험을 다루자는 것이다.


 일상을 느낀다는 의미는 바로 이 '즉시성'의 연장이라 생각한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불안한 미래를 앞서서 보지 않고, 바로 지금을 바라보기. 마음을 치료하는 데도 중요한 이 방식은, 언제나 우리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또 하나 다른 심리 치료를 얘기해보자면, '실존적 심리치료'라는 이론이다. 두 번째로 크게 인상이 남은 이론인가 보다. 여기서는 인간 실존에 대한 특성을 말하는데, 그중 하나가 '무의미'이다. 아까부터 구구절절 의미를 논했더니 무의미가 튀어나왔다. 그렇다. 사실 이 세계는 무의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고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그게 무슨 고생인가 싶겠지만, 인간은 그런 행위를 통해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안 그래도 멋대로 내던져진 세상 - 이를 삶의 피투성(彼投性)이라고 한다 - 에서 허무함, 공허함, 무력감을 경험하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던 일상의 의미를 찾고 그 가치를 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의미한 세상을 의미 있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목적이지 않을까.




참고문헌 : 권석만 (2012년). 현대 심리 치료와 상담 이론. 서울: 학지사.




일상이 인생



 우리는 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것을 생각하며 눈을 감을지가 중요하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고뇌한다. 물론 이런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나 또한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지금 이 순간'에는 무엇을 느끼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인생도 크게 봐서야 인생이지 우리는 단지 지금을 살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지금들이 모여서 결국 인생이 되는 것이니, 이를 놓친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을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얻게 된 의미들은 결론적으론 인정하는 법을 알려준다. 앞서 말했던 모든 개념들을 인정할 수 있다. 처음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금'을 인정하게 된다. 복잡한 생각이 잠재워지고 지금 내가 숨 쉬는 이 공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눈 앞에 놓인 사물과 공기와 바람, 그리고 닿는 나의 시선, 빛과 그림자와 색깔과 소리.


 그러다 보면 또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이 행위는 생각보다 '나도 모르던 나'를 많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행동을 할 때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을 지녔었는지, 내가 나를 이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었는지, 중요한 순간을 느끼던 작은 버릇이라든가, 그런 것들. 이런 식으로 '나'를 인정하면서,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나 의미를, 뚜렷하진 않아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일상의 가치는 꽤 큰 교훈이 되어 다가와, 곧 인생이 된다.



 그렇게 보면 결국 일상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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