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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z Aug 31. 2018

세상에 이분법적인 것은 없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의 의미




'그렇구나'의 세상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세상에 이분법적인 건 없는 것 같아.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해오던, 아주 오래된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던진 나의 한마디였다. 이과와 문과, 이성과 감성, 외향과 내향, 심지어 어울리는 색깔마저도 굳이 나누던 내가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게 새삼 놀라웠을 것이다. 대게 이곳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로 떠들썩하지만, 가끔은 진지한 - 우리에게 의미가 없는 소리들 외엔 다 진지한 것이다. - 세상사 이야기도 가능하다. 우린 아마 당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20대가 되고 난 후부터 끊이지 않는 이 사랑 이야기는, 우리들만의 사랑뿐 아니라 조금 다른 형태의, 모든 이들의 사랑에서도 이어졌다.

 

 실은 이 '사랑 이야기'는 '사람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우리 친구들 대부분 사람과 엮이는 전공과 직업을 가지다 보니,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이야기는 일상과도 같다. 그렇게 일상과도 같지만, 언제나 흥미롭고 새로우며 신비하다. 인문학적, 사회학적인 사람 이야기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 이야기든 모두 그렇다. 그렇기에 사람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 이리도 많은 것 아니겠나.


 사람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대학생이 되자 풍성해졌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은 늘 테두리 안이었다. 비슷한 동네, 수능이라는 인생의 같은 방향, 작은 교실, 한정된 시야. 그 안에서 별 다른 '다름'은 느끼지 못하고 자라났다. 대학에 가니 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정도로 사람들은 많고 다양했다. 비슷한 생각에 '맞아, 맞아.'만 하던 아이들은 다 어디 가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해랄 것도 없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쩌고 저쩌고가 아닌, 단지 '그렇구나'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렇구나'를 말하게 되는 세상의 다양한 것들은 많아져갔다.


 그리고 그날도 사람과 사랑과 모든 일상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그렇구나'를 외쳐가며, 아무래도 세상은 이분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모든 존재는 스펙트럼 상의 것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바로서는, 세상에 이분법적인 것은 없다. 성격, 성향, 취향부터 사랑도 그러하고 하물며 성별도 그렇다.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것은 있겠으나, 그것을 온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건 잘 모를 일이다. 누구든 남성성이 있고 여성성이 있다.


 또한 명확히 반대인 것, 혹은 옳고 그름을 보통 흑과 백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확히 구분 짓기는 힘들어 보인다. 누가 봐도 검지만, 알고 보면 흰색이 살짝 가미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검은색이라 할 수 없나? 흰색이 섞였으므로 회색이라 부른다면 결국 이분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임을 알지만, 둘로만 나누어진 세상을 모두 건드려보고자 하는 의미에서다.


 조금 웃긴 건, 나조차도 세상을 이분하길 좋아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그랬던고 하니, 내향적인 성격의 나를 외향적인 사람들이 신기하단 식으로 표현했던 일이 꽤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수업을 마치고 바로 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단 사실에 적잖이 놀란 이후로, 누구는 내향적이고 다른 누구는 외향적이고 하며 구분 짓고 다녔다. 이렇게 말은 내향적과 외향적이라 하지만, 사실 나는 65%의 내향성과 35%의 외향성 - MBTI(성격유형검사) 결과지만, 물론 정확한 수치일 리는 없다. - 이 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반 조금 덜 되는 외향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나를 내향적인 사람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모든 존재는 스펙트럼 상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한 이 정도쯤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 정확히 중간일 수도 없다. 그렇게 보면 존재는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이해'란, 상황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이지 존재에 대해 이해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듯하다. 무엇이 기준이 되며, 무엇이 무엇을 이해할 수 있나?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편의상 그렇게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고, 통념에 맞추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다.


 100의 존재가 있다면 100만큼의 특성이 있다. 따라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도 같다. 굳이 이것이고, 저것임을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지 세상에 서있는 것들'에 이유를 붙여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양한 색깔이 경계 없이 이어진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처럼, 경계 없는 빛깔이 모여 있는 세상이라면 더 아름다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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