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어느 특별한 지점에 대하여
J는 아기를 원하지 않았다.
살아온 지난한 인생이 너무 힘겨워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그저 고난의 연속이라고 자조적인 말투로 말했다. 물론 기쁘고 즐거운 일들도 있었지만 J에게 삶은 그저 끊임없이 세상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순간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스스로가 무슨 권리로 그런 고난을 대물림하는지 물었다. 거기에는 마땅히 나도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그럭저럭 나쁘거나 어렵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마냥 좋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으니까.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은 즐거움, 기쁨, 슬픔, 화남, 무기력함 등 에너지를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번갈아 내 마음을 스치며 시끄럽게 속살거렸다. 마치 머릿속에 라디오 여러 대를 동시에 켜놓은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막상 또 떼놓고 보면 정말 고단한 일이 아닌가. 이런 와중에 나보다 더 신경 쓰고 챙겨야 할 무언가가 생긴다는 것이 그저 흔쾌한 일은 아니었다. J와 나 둘이 소소한 작은 행복에 만족하며 잘 살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매해 의무적으로 받는 건강검진에서 여러 차례 임신이 쉽지 않다고 했다. 나중에 아이가 없으면 후회할 수도 있다는 주변 오지랖이 내심 그럴듯하여 처방받은 약을 챙겨 먹었다. 그렇긴 해도 아이에 대한 생각이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상의 노력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J는 나의 다른 건강에 큰 문제만 없다면 오히려 그 사실이 기꺼운 눈치였다. J는 아기를 원하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어느 날, 너무 늦어진 생리현상에 혹시나 싶어 임신 테스트기를 구매했다. 선명한 빨간 두 줄. 내 안에 모르는 새 두 개의 심장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의미를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느낌인가 돌이켜보면 기껍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몇 주가 지나 아기집을 확인할 수 있을 무렵에 떨리는 손으로 J의 손을 잡고 병원을 방문하여 초음파를 확인했다. 검은색 화면에 아기의 모습이 잡히는 순간, 아- 하고 탄식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강하게 요동치는 너의 심장 소리. 온 우주에 울려 퍼질 정도로 요동치는 작은 너의 심장 소리. 내 손을 쥔 J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J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그의 두 눈이 초음파 화면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우리는 같이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그 우렁찬 심장 소리의 여운에 깊이 잠겨있었다. 어쩌면 그리 강렬한 소리인지. 마침내 J가 입을 열어 나에게 말했다.
‘나는 벌써 사랑에 빠질 것 같아.’
11시간 가까이 힘들게 겪은 진통 끝에 무언가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큰 숨을 한 번 내시고, 울음소리가 들리기까지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우렁찬 울음소리가 작은 분만실 안을 꽉 채울 정도로 울려 퍼졌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마음이 벅찼다.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쿵쾅거렸다. J가 먼저 아기를 살폈다. 분만사가 아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주며 J에게 보였다. 그러자 J가 뜸을 들이다 탯줄을 잘랐다. 쉽게 잘리지는 않는지 한참을 애쓰고 있었다. 마침내 탯줄을 자른 후 붉은 수건에 감싸진 아기를 소중히 안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J의 눈가가 발갛다. 큰 눈에 눈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에게 아기를 보여주며 들릴 듯 말 듯 사랑한다고, 고생했다고 속삭였다. J의 눈을 잠시 마주하고 나도 사랑한다 대답한 후 비로소 너를 만났다.
그리고, 바로 사랑에 빠졌다.
아기는 나를 보면 싱긋 웃고, ‘엄마-’ 하고 부르며 두 손을 뻗는다.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 있으면 지붕이 떠나갈 정도로 울어재낀다. 그대로 그 자리에 드러누워 두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떼를 쓴다. 포크로 강냉이를 떠먹으려고 하길래, ‘포크로는 안 집어지지!’라고 하니까 천연덕스럽게 포크로 강냉이 하나를 들어 올리며 ‘되는 데에?’라고 대답한다. 할머니는 자기한테 유독 관대하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서 엄마 몰래 할머니 귀에 대고 비타민을 내놓으라 속살거린다. 온갖 장난감들을 빨래 바구니에 숨겨두고 모른 척한다. 내가 늦게 오면 작은 두 손을 허리에 걸치고 나름의 무서운 표정을 앙하고 지으며 ‘엄마 왜 늦게 왔어?’라고 말한다. 밤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한밤 중 설핏 깨면 내가 옆에 있는지 발로 더듬더듬 나를 찾는다. 벌써 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
그러나 아기가 가장 잘하는 것은 온 세상에 사랑을 채우는 것이다. 퇴근 후에 멀찍이 미뤄둔 집안일을 하고 아기를 재우면 벌써 잘 시간이 다가온다. 자기 전에는 항상 그날 하루 나를 스쳐간 온갖 것들이 머릿속에 맴도느라 오랫동안 뒤척이게 된다. 밤부엉이 체질이라 그런 것일까. 그렇게 별별 생각과 걱정이 꼬리를 물고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든다.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다시 아침이 밝아온다.
햇빛이 어느덧 발치까지 밀고 들어온다. 내 배 위로 뭔가 묵직한 것이 덥석 안겨온다. “엄마 일어나!” 세상 아무것도 부정한 것이 없다는 듯한 맑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본다. 통통 두드리며 전해오는 살결이 햇빛과 같다. 마음 언저리에 똬리를 튼 부정함이 썰물처럼 밀려 나간다. 삶이 자라난다. 잎사귀마다 흠뻑 햇빛을 머금어 싱그러운 나무들처럼. 나는 오늘도 너를 통해 빛을 머금는다. 나는 네 덕분에 자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