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출산 여정기(1)

임신은 처음이어서

by 우주

선명한 빨간 두줄이었다. 내심 짐작가는 부분이 있어서 확인한 것이긴 하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보고나니 약간의 선뜩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임신에 대해 떠드는 것처럼 나역시 코로나 키트로나 두 줄이란 것을 경험했었지, 이렇게도 직설적인 확인은 처음이었다. 팔에 오소소 털이 일어나며 종아리에 힘이 느슨해졌다. 눈치없는 로봇청소기는 여기저기 꽝꽝 부딪히며 소음을 내다 마침내 내 발목을 박았다. ‘쿵’, 멍하게 앉아있다가 통증에 정신을 차렸다. 불현듯 J에게 알려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어쩐지 지난 주 모처럼 벚꽃이 만개한 섬진강까지 내려가서 자전거를 타고난 후 여간 몸이 고된 것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체력은 자신 있었는데 기껏 2시간 정도 페달을 밟고서는 맥을 못추고 지쳐 쓰러져 초저녁부터 꿈도 안꾸고 이른 잠을 잤었지, 기억을 더듬는 입맛이 썼다. 카카오톡으로 J에게 사진을 보낸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 짧은 사이에 사진을 확인하고는 ‘코로나야?’ 하고 태연한척 물어온다. 어쩌면 이렇게 뻔한 레파토리일까 싶어서 비죽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근엄하게 ‘다시 한번 살펴봐.’라고 말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침묵을 지키며 기다렸더니 흐흐 하는 웃음이 귓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오늘 일찍 올꺼야?’ 기대하는 말투로 J에게 물었다. ‘그래야지. 컨디션은 어때?’, ‘그럭저럭인데, 병원 가서 제대로 다시 확인할거야. 확실해지면 다시 알려줄께.’ 둘 다 안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른인 것 마냥 이야기를 나눈 것이 우스웠다.


집안 곳곳 벌려져 있던 일을 한차례 마무리하고 동네 산부인과에서 간단하게 피검사를 했다. 테스트기의 진한 색상만큼이나 명확한 검사 수치. 세자리 단위의 무작위 숫자가 알려주는 결과는 임신이었다. 간호사가 검사 결과지를 한 손에 들고 나를 초음파실로 안내했다. 얼떨떨한 느낌으로 진료대에 누워 초음파로 아기집을 확인했다. 내 눈으로는 식별도 안되는 검은 동그라미에 금새 마킹을 하고 초음파 사진을 인쇄한다. 검은 동그라미만 보이고 그 안에 사람이 들었을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도대체 아기가 어딨다는 거지, 하고 궁금해하는 와중에 얼굴이 동그란 내 나이 또래의 여의사는 그 사진을 건네며 싱긋 웃고는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다. 예정일은 12월 15일 이었다. 병원에 간 그 날이 4월이었는데 8개월 만에 나에게 작은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니, 정말 그래도 되는건가 싶었다. 몇 가지 당부사항을 듣고 꿈을 꾸는 듯한 느낌으로 초음파 사진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결혼은 했다지만 주말이면 우리 집이 아닌 굳이굳이 엄마 집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곤 했다. 엄마는 식탁에 앉기도 귀찮아하는 나에게 한 수저라도 더 먹이려고 김을 싼 밥을 입에 쏙쏙 넣어주고, 나는 그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아- 하고 받아먹는다. 이런 모지리가 정말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을까? 그것도 갓난 아기를? 저녁 9시즈음에 집으로 돌아 온 J는 빈손이었다. 맥이 탁 풀린 내가 뾰로퉁하게 졸리다고 하니 약간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알리에서 산 허접한 장난감 헬리콥터를 요 앞에서 날려보고 와도 되냐고 물어본다. 말없이 J의 해맑은 말간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이 인간아, 올 해 안에 우리에게 작은 사람이 생긴다고. J는 그 날 헬리콥터를 날리러 가지 못했다. (주변에 이 이야기를 하면 대번에 안타까운 신음이 새어나온다)


우리 시어머니는 태몽이라는 것을 평소 그렇게 잘 꾸셨다. 오지랍 넓은 시골 할머니답게 온갖 주변 가족들의 태몽을 다 꿔다주셨다. 어느날 뜬금없이 간 밤에 작은 흰 뱀이 쫓아와서 발목을 콱 물길래 손사레를 쳐 쫓아내는 꿈을 꿨다는 말을 전하며 혹시 좋은 소식 없냐고 물어왔다. 그때 당시에는 임신은 생각지도 않던 터라 때마침 주변에 아기가 생겼다며 소식을 전해 온 이종사촌의 태몽인가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리 오지랍이 넓어도 이종사촌의 태몽이라니. 굳이 따지자면 내 임신을 겨냥한 태몽이 맞았다. ‘뱀을 쫓아내면 안되는 것 아닌가? 그 하얀 꽃뱀이 어머니 손주일텐데.’ 라는 맥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곧이어 임신 사실을 알고 며칠이 지난 무렵에 나도 꿈을 하나 꾸었다. 꿈을 흑백으로 꾸는 사람도 있고, 생생하게 컬러로 꾸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컬러로 꿈을 꾼다. 색감도 제법 선명한 편인데, 그걸 알아챈 것은 내 뭉게구름 위 구름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냉장고에 넣어 둔 오렌지 주스 색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튼 각설하고, 그 날은 색감의 생생함을 넘어 맛과 향까지 기억이 났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 아래 야트막한 정자에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 3명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 놓인 라탄 바구니에 새빨간 복숭아 7~8개정도가 소복히 담겨있었다. 대각선에 앉은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접시에 복숭아를 예쁘게 깎아 먹으라고 놓아주는데, 그 복숭아 속살이 어찌나 새하얗던지! 접시 위에 놓이기가 무섭게 내가 혼자 다 먹어치우고는 마지막 한 개가 남았는데 속없이 그것마저 내가 다 먹고 싶어서 한 손에 들고 먹을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다. 세명 모두 은근히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길래 그럼 내가 먹겠다, 하고는 와삭하고 베어무니 손목을 타고 과즙이 흐를 정도로 알찼고 향긋했다. 잠에서 깨어 한참을 지나도 그 장면이 생생하길래 ‘아, 이게 바로 태몽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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