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라켄에서 2박을 묵으며 융프라우요흐와 그뤼예르, 까이에 초콜릿 공장 등을 둘러보고 우리는 체르마트(Zermatt)로 향했다. 마테호른(Matterhorn)이라는 알프스에서 가장 유명한 산 또는 봉우리로 유명한 체르마트는 그 외에도 휘발유 차량의 통행이 불가능한 청정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이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한 곳으로 사랑받는 것에는 이 부분이 크게 기여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동차로 스위스 전역을 여행하고 있었고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에 체르마트로 들어갈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는 테쉬(Tasch)라는 마을을 알게 되었다.
차량으로 체르마트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인근 마을인 테쉬에 주차를 하고 체르마트까지 운행되는 기차를 타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주차였다. 처음 가는 지역이었고 이 마을의 주차 시스템을 100%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량을 아무 곳에나 방치해두고 체르마트로 이동하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애초에 테쉬에 있는 숙소로 예약을 했고, 그곳에 주차를 하고 체르마트를 구경한 뒤 테쉬로 돌아와 숙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마 루체른을 여행할 즈음에 알 수 없는 국제전화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외국인과 대면이 아닌 통화로 대화한 것은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스팸전화로 여겨 받지 않을 요량이었지만,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어서 받아보니 테쉬에서 묵을 숙소로부터의 전화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폭설로 인해 예상치 못한 보수공사가 필요한 상황으로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다행히 체르마트에 있는 제휴 호텔에서 묵을 수 있도록 이미 조치를 다 취해놓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차량은 자신들의 호텔에 주차를 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도 함께 알려주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주차 문제로 인해 체르마트에 있는 숙소를 이용하지 못했는데 이 모든 곳이 한 번에 해결되었다.
테쉬에서 도착하니 숙소에서 얘기한 폭설의 흔적이 온 세상에 펼쳐있었다. 땅에는 그 아래에 콘크리트가 있는지 아스팔트가 있는지 아니면 초록 잔디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고, 지붕에 쌓인 눈의 높이로만 그 깊이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붕 끝에 얼어 있는 고드름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고드름이었다. 칼 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이의 고드름에 숨어있던 우리의 동심이 깨어날 정도였다. 새하얀 눈밭과 동화 같은 고드름. 우리는 눈 밭에 뒹굴며 나비를 만들었고, 고드름으로 칼 놀이를 하며 청정마을로 들어가기 전 우리의 마음을 맑게 했다.
테쉬에서 체르마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체르마트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눈으로 덮인 바깥 풍경을 감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체르마트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들렸고, 플랫폼의 흰 벽에는 여러 언어로 환영의 인사가 새겨져 있었다. 반가운 우리의 "환영합니다"라는 문구도 함께 있었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관광지인만큼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체르마트역을 빠져나오니 숙소로 향하는 전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휘발유 차량의 통행이 제한되기 때문에 거리에서 전기차나 마차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로부터 보름 정도가 지났지만 하얀 눈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역 앞 거대한 트리가 시간을 멈추게 한 듯 크리스마스에 머물러있었다.
전기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니 대체 숙소라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정원이 보이는 1층 방으로 입실하고 체르마트를 둘러보기 위해서 서둘러 나왔다. 마을은 걸어서 다니기에도 그렇게 넓지 않은 곳이었다. 마을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호텔부터 마테호른이 보이는 서쪽 지역까지 주위를 둘러보며 가볍게 걸었다. 미뤄두었던 점심식사도 하고, 스위스를 떠나기 전 지인들에게 선물할 초콜릿도 사고, 서점도 둘러보고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공원, 건물 등 곳곳을 살펴보았다.
아쉽게도 우리는 트레킹을 할 준비가 되어있진 않았기 때문에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서 마테호른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날씨는 여전히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기대했던 마테호른의 봉우리는 하얀 구름으로 뒤덮여져 있었고 가끔씩 고개를 내미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또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차마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다. 보일락 말락 하는 마테호른의 풍경을 뒤에 두고 한참을 사진을 찍었지만 건질만한 사진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날씨를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기에 미련을 접어두고 다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작은 광장 앞에 세워져 있는 산양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 해가 뉘엿거렸고 어느새 주변은 여러 상점가에서 밝히는 주홍색 불빛으로 물들었다. 주홍색 불빛 사이로 보랏빛의 무언가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벨베디어라는 보드카의 프로모션 장이었는데 얼음 안쪽으로 얼어져 있는 보드카병과 보랏빛 조명이 화려한 곳이었다. 친절한 직원분이 따라주신 보드카 한 샷에 속이 순간적으로 따뜻해졌고, 추운 지역에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높은 도수의 술을 찾는 이유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작고 자연으로 둘러 쌓인 마을이었기에 해가 지고 나서는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호텔 내부에 배드민턴장 등 편의시설이 있어 친구들과 지난 여행에 대한 얘기도 하고 함께 운동도 하는 등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은 국경을 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출발해야 했고 아쉽지만 장거리 운전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