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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결 May 17. 2020

『이방인』, 알베르 카뮈 - 삶의 이방인이 되지 않기

『이방인』알베르 카뮈 (2011, 민음사)


들어가는 글


    우리의 일상을 더 이상 돌아올 수 없게 만들고 대신 새로운 일상이라는 뉴 노멀(New Normal)로의 전환을 가속화시킨 코로나 19는 뜻하지 않게 출판·문학계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재조명받고 있는 작품은 알베르 카뮈의《페스트(La Peste)》로 1947년에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태를 미리 예견한 것처럼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인류의 행동 양상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는 영화《컨테이젼(Contagion)》과 비슷하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알베르 카뮈의 또 다른 대표작《이방인(L'Etranger)》이다. 알베르 카뮈에게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안겨준 작품으로 워낙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읽었을 작품으로 생각된다.


    나는 이 작품을 박웅현님의《책은 도끼다》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이방인》을 지중해 문학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으며, 지중해 지역의 하얀 대리석 집과 새파란 바다의 빛깔, 기분 좋은 바람을 상상하니 작품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저 마음이 끌렸다. 뿐만 아니라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라는 이 작품의 첫 구절을 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인 문학 작품의 첫 구절 중 하나로 꼽는지도 궁금했다. 이런 기대감을 품고 서점에서 이 책을 덥석 구매했고, 담배를 짧게 문 알베르 카뮈의 사진이 표지에 실려있는 민음사의 출간본이 퍽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책을 펼쳐보니 생각보다 어려운 내용이었고 방향성 없는 의식의 흐름처럼 진행되는 주인공 뫼르소의 서술을 쫓아가도 보면 나 역시도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했다. 그렇게《이방인》은 어려운 작품으로 머물러 있었다.


    이후 최근 우연한 계기로 이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작품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알베르 카뮈의 문체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읽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야 왜 이 작품을 지중해 문학으로 분류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작품은 쏟아지는 햇볕의 뜨거운 느낌과 해안으로 널리 펼쳐있는 햇볕에 부서지는 바닷가의 모습을 글이 아니라 피부와 눈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을 피해 물놀이를 즐기고 식당의 테라스 자리에서 식사를 즐기는 등의 지중해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다시 읽고 나서 다른 사람들과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면서 왜 뫼르소가 이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깊게 생각해보았다. 본인은 부인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분류되는 알베르 카뮈가《이방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조금은 다가간 것 같다. 그럼 지금부터《이방인》에 대한 생각 나눔을 시작하겠다.


이야기


<1부>

    프랑스 치하의 북아프리카 알제의 평범한 직장인인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녀의 장례식장에 가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슬픈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어머니의 시신 옆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장례를 치른다. 다음 날 전 직장 동료인 마리와 우연히 마주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와 이야기하고 희극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이웃집 사람 레몽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고, 레몽은 뫼르소와 마리를 그의 지인인 마송의 해변가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레몽을 미행하던 그의 옛 애인의 오빠와 한 무리의 아랍인들과 마주친다. 싸움이 벌어졌지만 레몽만 조금 다쳤을 뿐 소동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해변가의 집으로 돌아온 뫼르소는 답답함을 느끼며 다시 시원한 샘가로 간다. 그곳에서 레몽을 찔렀던 아랍인을 만나고 뫼르소는 그가 꺼내난 칼의 강렬한 빛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권총을 쏜다.

<2부>

    이로 인해 그는 재판을 받게 되었고 처음에 그는 법정 등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로 재판이 끝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사건 자체보다는 어머니의 장례에서 그다지 슬퍼하지 않은 그의 모습 등으로 인해 재판은 점점 그에게 불리해지는 양상을 띤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형의 집행 전 한 신부가 찾아와 그에게 죄를 털어놓을 것을 권한다. 신부의 끈질긴 권유에 뫼르소는 신부의 허위적인 면을 꾸짖고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며 이를 거부한다.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은 처형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증오를 퍼붓는 것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지중해의 풍경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그 지역의 풍경 묘사였다. 지중해의 명칭은 말 그대로 땅 한가운데에 있다는 뜻으로 이 지역에서는 언제든 바닷가에 닿을 수 있고 사람들은 뜨거운 햇살과 기분 좋은 바닷바람과 함께 살아간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책의 구절이 있다.


"어제 하루의 일로 피곤했기 때문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면도를 하면서 오늘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수영을 하러 가기로 했다. 나는 전차를 타고 항수 해수욕장으로 갔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바닷가로 수영을 하는 사람이 흔치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부산 또는 인천에 사는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바닷가에 수영을 가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반대로 오히려 부산 사람들이 해운대에 가지 않는다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다. 주변에 바다가 있다고 해서 이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되고 바다가 삶이 되어야지만 그럴 수 있다. 그곳의 사람들에게는 지중해가 삶이다.


"나는 창문을 열어 두었는데 여름밤이 우리의 갈색으로 그은 몸 위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참으로 상쾌했다."


    뜨거운 태양이 넘어간 후 밤의 기분 좋은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다. 뿐만 아니라 햇볕에 그을린 이 곳 사람들의 피부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묘사들은 작품 곳곳을 수놓고 있다. 마지막으로 뫼르소와 그의 일행들이 알제 교외의 바닷가로 향할 때 나오는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이 구절을 읽으면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언덕 너머로 노란 돌과 새하얀 수선화, 형형색색의 울타리가 둘러쳐진 작은 별장을 지나 펼쳐지는 지중해의 바다 풍경이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냥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직접 언덕을 넘어가다 하늘을 조금씩 덮어가는 또 다른 느낌의 푸른색 바다를 발견하는 느낌이 밀려온다.


"언덕은 하늘의 이미 단단해진 푸른빛을 배경으로 노란 돌들과 새하얀 수선화들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는 초록색 또는 흰색 울타리를 둘러친 작은 별장들이 늘어선 사이를 걸어갔다. 언덕 끝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 움직이지 않는 바다가 눈앞에 나타나고, 더 멀리 맑은 물속에 조는 듯 육중한 곶이 보였다. 저 멀리 조그만 트롤 어선 한 척이, 반짝이는 바다 위로 움직이는 듯 마는 듯 가고 있었다. 바닷가에는 벌써 수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뫼르소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주인공 뫼르소를 처음 접했을 때 그가 지나치게 의욕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삶의 질문에 대해 '예'와 '아니오'라는 답변이 있으면 '잘 모르겠음'을 선택하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 대답은 깊은 고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질문에 대해 큰 생각이 없고 더 나아가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없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 같았다.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레몽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는 그의 태도와 결혼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이러한 그의 삶의 자세를 볼 수 있다.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레몽의 부탁에 뫼르소는 아무런 고민 없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심지어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힘썼다. 왜냐하면 그는 레몽에게 마음에 들지 않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가 레몽의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를 그냥 되는대로 한 것이다. 더욱 재밌는 것은 이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는 레몽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뫼르소의 친절에 감동한 레몽은 그들이 진정한 친구가 되었음을 얘기한다. 이에 대해 뫼르소는 "그렇지"라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그의 친구가 된다 해도 내겐 상관없는 일이었고, 그는 정말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라고 생각한다. 이 무슨 모순인가.


    뫼르소에게 자신과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는 마리의 질문에 답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라고 대답한다. 결혼도 마찬가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감정도 뫼르소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뫼르소의 이러한 모습의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주체적으로 하는 선택은 없었고 싫지 않고 귀찮지 않은 일이라면 그냥 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가 이미 그의 삶에서 이방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듯했다.


    이러한 그의 이방인적인 태도는 종국에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아랍인을 살해인 이후, 재판에서도 상황의 모든 맥락을 생략하고서는 "햇빛이 눈부셔서 그랬다"라는 진술을 반복하며 재판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데에 스스로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뫼르소가 작품에서 시종일관 이방인적인 모습만을 보인 것은 아니다. 일순간 삶에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 두 장면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아랍인에게 권총을 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뫼르소는 아랍인에게 총 다섯 발을 쏜다. 그중 한 발은 아랍인이 꺼내는 칼의 강렬한 빛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쏜 것처럼 표현된다. 하지만 이후 네 발은 작품에서 설명된 것처럼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분명한 의지로 쏘아진다. 사실 아직까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삶에 소극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기만 하던 그가 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네 발의 총알을 쏘았는지. 심지어 이미 목숨이 끊어져버린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에게 말이다.


이방인


    뫼르소는 그의 삶에서 이방인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를 둘러싼 세상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느낀다. 하지만 이 자체가 죄악은 아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뫼르소는 그에 솔직하게 행동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뫼르소를 이용하는 또 다른 이방인들이다.


    뫼르소의 이런 이방인적인 태도는 예심판사, 기자, 증인, 배심원 등 또 다른 이방인들에게 이용된다. 아무런 구체적인 의도 없이 이루어진 행동들이 마치 정교하게 계획된 그리고 무자비한 행동으로 재구성되었고, 그 순간 이미 뫼르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그의 모습이 아닌 그들이 해석한 모습으로 살게 된다. 이방인적인 태도로만 머물러 있었던 그가 실제로 그의 삶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순간이다. 반대로 예심판사, 기자, 증인과 같은 그의 삶의 이방인들이 오히려 삶의 중대한 의사결정을 결정짓게 되었고 이방인을 넘어 삶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한 이방인들 중 하나인 사제가 도리어 뫼르소를 구원해주겠다고 나서니 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네 발의 총알은 뫼르소가 분명한 의지를 담고 쏜 것이었다. 뫼르소 본인도 이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이를 나타내는 장면이 뫼르소가 그의 삶에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두 번째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이 장면은 사형선고 이후 만나게 된 사제와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뫼르소는 사제의 지속된 회개 요구에 참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터뜨린다. 뫼르소 자신에게는 스스로와 모든 것, 인생과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고 반대로 사제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으며 그가 죽은 사람처럼 살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그의 마음속 이야기를 모두 쏟아 버린다. 분명 이방인적인 그의 태도로 인해 그의 삶이 꼬여버렸지만 이에 확실한 단초를 제공한 행동은 뫼르소 본인의 확실한 의지로 행했음을 역설하는 듯했다.


마치는 글


    비록 나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것들이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정되는 경우가 분명히 많다. 이 때문인지 우리는 "되는 일이 없다" 등의 말을 꽤 많이 하고 사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에 너무 많이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싶다. 내 인생에는 분명히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순간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하고 내 삶이 이방인들에게 결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이해하면서도 내 의지를 넓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방인》이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으로 고려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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