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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결 Apr 01. 2019

『러빙 빈센트』- 2017년 나의 영화

- Loving the way it is

주의 : 영화 리뷰가 아닙니다.


나의 영화

    매주 한 편의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3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소재가 고갈되었다. 얼마나 특별한 일이 없었길래 이렇게 쓸 소재가 없었나라고 자책도 해보지만, 나쁜 일 없이 무탈하게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퍽 안심도 든다. 오랜 친구들이 모이면 벌써 몇 년째 얘기하고 또 얘기하는 추억처럼 나도 이번 주는 옛 생각을 적어볼까 한다. 영화와 영화에 대한 나의 감상이다.


    나는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감상한 작품의 수와 영화를 보는 빈도로만 따져보았을 때, 적어도 내 주변에는 나를 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책을 정독하는 것처럼 영화를 꾹꾹 눌러보는 것은 아니며, 감상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전문적으로 작성한다거나 감독의 의도와 연출 방식 등을 꿰뚫어보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시각을 가지고 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노력의 결과로 매 년 나만의 영화 시상식을 개최한다. 이 영화제의 상은 하나뿐이다. '0000년 나의 영화' 이 시상식은 다른 시상들처럼 연말에 한 번 개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화를 볼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수시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토너먼트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 평론 전문가가 아닌 무척이나 일반인인 내가 꼽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 선정기준은 무척 주관적이다. 영화의 내용보다도 그 당시 내가 처한 상황가 나의 이야기가 우선이며, 감독의 연출보다도 영화와 내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우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밝혀놓은 것처럼 이 글은 절대로 영화 리뷰가 아니며, 나 자신의 이야기이다. 서론이 길었다. 2017년 나의 영화인 '러빙 빈센트'와 내 얘기를 시작하겠다.


러빙 빈센트


러빙 빈센트 (2017)


    이전부터 이 영화의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독특한 표현 방식과 그 뒷면에 담겨있는 수많은 화가들의 노력 등에 작품의 내용이 어떨지라도 이미 그것에 큰 기대를 갖게 되었고, 고흐에 대한 가장 큰 기록물인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박물관에서 직접 보았기에 감정적으로 뭔가 가까워진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상주의 작품을 좋아하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고흐가 죽은 지 1년 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고흐에게 많은 우편물을 전해주었던 조셉 룰랭은 고흐가 죽기 직전 동생 테오에게 남긴 편지를 그의 아들 아르망 룰랭에게 전달해주기를 부탁한다. 아르망 룰랭은 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고흐의 삶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영화는 그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이 영화가 2017년 나의 영화로 선정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유화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영화의 독특한 표현방식도 그중 하나이며, 개인적으로 인상주의 표현방식과 유화를 좋아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그의 나라인 네덜란드를 가보았기 때문이기도, 그의 작품인 '별이 빛나는 밤'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2017년 최고의 영화로 꼽는 이유는 이 영화가 전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고흐의 대사이다. 영화의 질문과 대사는 당시 힘들었던 상황에 있었던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해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듯했다.


삶의 의미

    한국에서 이 영화는 2017년 말에 개봉했다. 마침 나는 2017년 10월부터 큰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그 이유까지 여기 적기에는 숨기고 싶은 사적인 부분이라 밝힐 수는 없지만,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삶과 관계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내가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과 삶의 의미를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관 없이 살아온 나의 지난날에 대해 후회했고,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주변 환경에 신물 났다. 그럴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심해져갔고 내가 했던 것들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부정하기 시작했다. 무척 힘든 시기였다. 나 자신의 존재 의미가 혼란스러웠다. 그럴수록 주변 사람들과의 연락도 끊게 되었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갔다. 나는 그러한 시기에 이 영화를 본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때를 돌이켜보는 지금 그 당시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사진들이 하나같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특히, 2017년 12월 선유도공원에서 찍은 사진들은 어딘가 슬프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추운 날씨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충동적인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던 상황이 기억난다. 사진에 감정을 담는다곤 하지만 내가 의도하지 않은 감정이 담겨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선유도공원에서 찍은 갈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영화의 마지막은 고흐의 한 장의 편지 내용으로 끝이 난다. 바로 그 문장이 당시 나에게 큰 울림을 준 것이다.


화가의 삶에서 죽음은 아마 별것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별을 볼 때면 언제나 꿈꾸게 돼.
난 스스로에게 말하지.
왜 우린 창공의 불꽃에 접근할 수 없을까.
혹시 죽음이 우리를 별로 데려가는 걸까.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겠지.

- 러빙 빈센트 중


    영화는 관객들에게 영화가 다루는 내용에 대한 해답을 정확하게 주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 대사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내리기를 요할 뿐이다. 고흐는 어쩌면 창공의 불꽃에 혼심의 힘을 다해 달려가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에게는 그 방법이 자신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비단 화가의 삶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극단적인 선택에도 이와 같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선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나는 심정적으로 그 감정에 동조할 수 있었다.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싶었기에 나에게는 내 삶을 더 찬란하게 만들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안정적으로 바뀐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삶의 의미를 삶의 경계 밖에서 구하는 것은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마치 달리기 선수가 달리기가 힘들다고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자 선수이다. 삶이라는 레이스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셈이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레이스가 힘들더라도 삶 자체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하며 의미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그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물론 고흐의 선택이 그 당시 그에게는 최선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삶 속에 더 오래 남았었다면 더 좋은 작품이 인류에 남겨졌을 것이며, 황폐하게 그려진 그의 삶이 조금이라도 밝아지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도 해본다. 물론 그의 마지막이 이토록 극적이었기에 드라마적인 요소가 됐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의 삶에 대해 그가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서는 존중한다. 그가 느낀 감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납득이 된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고흐와 같은 고뇌에 빠진다면 그리고 나도 저 하늘의 별을 보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지금의 별도 사랑하지만 나는 더 아름다워질 별의 내일을 보고 싶다. 창공의 불꽃이 조금이라도 더 찬란해진 그때까지 나도 함께 찬란해지다가 가고 싶다고."


With a warm shake, to Loving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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