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나는 아이폰을 쓴다.
맥북도 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어폰만큼은 에어팟을 사용하지 않았다.
체험단 활동을 통해 공짜로 받은 소니의 노이즈캔슬링 이어폰, 그것이 내가 몇 년간 애용하던 이어폰이었다.
하지만 소니 이어폰과 나는 그리 좋은 궁합이 아니었다. 착용감 때문이었는지, 디자인 때문이었는지, 특히나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켜면 귀 안이 답답해져서 오래 끼고 있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어폰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기 말썽을 부리더니 완전히 작동을 멈춰버렸다.
때마침 생일이 가까웠던 참이었다. 생일선물로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 아내에게 에어팟을 사달라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에어팟은 아이폰과의 호환성이 완벽했다. 소니 이어폰을 사용할 때는 블루투스 연결이 끊어지거나 음질이 불안정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에어팟은 그런 문제가 전혀 없었다. 착용감도 편안하고 무게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에어팟이 생긴 이후로는 매일같이 들고 다니며 귀에 끼고 지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점심시간 산책할 때, 심지어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도 에어팟은 내 귀에 항상 꽂혀있었다. 어떨 때는 아무것도 듣지 않으면서도 외부와 단절된 느낌을 즐기기 위해 끼고 다니기도 했다.
환경이란 참 무섭다. 귀에 뭔가가 꽂혀 있으니 자연스럽게 뭔가를 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출근길에도, 강아지와 산책할 때도, 운동할 때도 항상 무언가를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노래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고 싶다'는 마음에 팟캐스트나 유튜브, 오디오북을 들었다. 걸으면서도, 운동하면서도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 효율성을 좋아하는 내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가만히 있을 때는 영상을, 움직일 때는 음성을 들으며 하루 종일 무언가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다. 하루를 돌아보면 엄청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만 있을 뿐, 그 정보들을 내 안에서 소화할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마치 계속해서 음식만 입에 넣고 씹지도, 삼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사색이 필요한 순간이구나.'
나는 요즘 무엇을 자주 생각하는가? 어떤 고민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이런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외부 자극이 없을 때 자주 하던 생각들이 한동안 내게서 멀어져 있음을 느꼈다.
햇빛은 뜨겁지만 그늘에 있으면 시원한 완벽한 날씨였다.
나는 이런 날 야외활동을 즐긴다.
따릉이를 빌렸다. 목적지까지 약 1시간 정도, 꽤 먼 거리다.
지루할 것 같아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최근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아, 최근 사색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했었지.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자연을 즐기며 천천히 이 좋은 날씨를 만끽해보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에 집중해보자.'
이어폰을 뺐다.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자전거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 기어를 변속할 때 나는 덜커덕거리는 소리, 조깅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커플의 웃음소리,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까지. 이어폰을 끼고 있을 때는 전혀 듣지 못했던 수많은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들어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벅차오르는 감정이 밀려왔다.
자전거 페달을 더 힘차게 굴렸다.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온몸으로 느꼈다.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을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동안 외부에서 주는 정보를 머릿속에 우겨넣기만 바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좋은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소화할 시간, 배출할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습관처럼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나서야, 오랜만에 나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재회하는 느낌이었다.
깊은 곳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받아들였던 흘러가는 정보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나만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