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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r 04. 2021

22. 게으른 이상주의자

완벽한 계획과 그렇지 못한 몸

 신년에는 각종 다이어리가 불티나게 팔리고, 10분 단위로 하루를 재단하는 플래너가 큰 인기를 끈다. 새벽에 부른 택배는 다음 날 점심에는 받을 수 있으며, 클릭 하나면 온갖 주문과 결재가 해결된다. 시간관리, 빨리빨리가 미덕인 세상에서 나는 꼬박 19년을 게으름뱅이로 살고 있다.


 무계획도 계획이고, 해야 할 일은 될 수 있을 만큼 미룬다. 서있기보다는 앉고,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있으며 가장 최대한의 잉여스러운 만족을 채우곤 한다. 고향집에 있을 때는 밥 먹는 것도 미룬 채 종일 바닥에 등을 붙이고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아프지도 않았고, 딱히 슬프지도 않았고, 우울감에 빠져 재기하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날은 정말 평범하게 행복했던 하루였다.


 어쩌다 누워서 뒹굴거리는 게 가장 행복한 몸으로 태어나버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그 연유를 안다 해서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삶의 비밀을 하나 더 깨우친 게으름뱅이로 살고 있겠지.


 다만 시간관리와 체계적인 삶이 각광받는 사회에서 나의 느릿한 삶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해서,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다양한 보호색으로 열심히 나태함을 감추며 살았다.


 남들이 좋다는 플래너를 사고, 하루 24시간을 시간과 분 단위로 나눠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보면 터무니없는 하루 계획이 완성되었다. 하루에 단어 100개를 외우면서 탐구 문제집 반 권을 풀고, 수학 문제는 몇십 개를 푸는데 국어 모의고사는 2세트를 푼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학교 일과가 끝나면 집에서는 토론과 창체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쓰는, 초인적인 삶을 계획하곤 했다. 누군가에겐 쉽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내 능력을 훌쩍 벗어나는 범위였다. 물론 지키지 못했고,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게으른데 눈치까지 많이 보는 이상주의자의 뻔한 말로였다. 몸은 늘어지고 싶은데 머리로는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싶고, 철저하고 부지런한 하루 일과를 짜 놓기는 했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거기에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이상적인 하루를 포기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하루를 재단해 나간다. 차라리 게으를 거면 머리랑 몸이 잘 호환되도록 게을러줬으면 하는데, 딱 이중인격이 아닐 정도로 부조화를 이루는 심신이 참 야속하기도, 이제와서는 신기하기도 하다.


 지금은 어떨까. 맹렬한 입시 경쟁에서 한 발 벗어나 숨을 돌리게 되어서인지, 남을 따라 쓰지도 못할 플래너를 사고 이루지 못할 계획을 세우는 소모적인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온갖 새로움에 둘러싸여 둥실 거리는 몸을 이곳에 맞는 형태로 빚어보려 노력하는 중이다. 이전만큼 안온한 게으름을 즐기기는 힘든, 혹독한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할 상황이라서 말이다. 그저 게으른 나를 타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적당한 계획을 세우며 대단치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부지런한 삶. 살면서 몇 번이고 탐했으면 탐했지 누구라고 그 삶을 싫어하겠나 싶다. 한없이 게으른 천성을 가진 사람조차 한 순간 혹하게 만드는 후광을 가지고 있지 않나. 다만 그걸 쫓는 와중에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어떤 하루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던 삶이 살아지고 있음은 이견이 없으니, 굳이 그 속도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서로 다른 유일한 형태로 오늘을 살아낸 모든 이들의 시간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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