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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r 19. 2021

쪽글 3. 일탈

 어제는 난데없이 외박을 하고 왔다. 연유를 말하자면 길지만 개요만 출이자면 다음과 같다. 그저께, 모처럼 강의를 일찍 듣고 연습실을 가려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도 잘 보지 못했던 반가운 친구라 신나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이 참 놀라웠다.


"너 한가해? 시간 있으면 만날래?"


 참고로 고향에서, 우린 서로 시간을 내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집과 집 간의 거리가 20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뭐가 그리 바빴는지. 무튼 고향에서도 내지 못한 시간을 지금 와서야 내자니 웃음이 났다. 그래서 서울에 온 지 처음으로 즉흥 약속을 잡았다. 한가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다만 이미 저녁에 다다른 때라 시간이 없었다. 결국 연습실 대여 시간을 조정해 1시간 만에 연습을 끝내고 급히 뚝섬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하자 가장 먼저 노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는 해와 물빛이 만나 꽤나 근사한 풍경을 자아내는데 저 멀리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세상에나. 졸업식 이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친구 놈들이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은 무시할 수 없는지 첫인사에선 어색함이 묻어났다. 이젠 한 학교의 한 교실이 아닌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살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때였다. 이내 실없이 대화를 나누며 정처 없이 걸었다. 한강을 건너 초면인 빌딩 숲을 헤매다 겨우 발견한 이탈리안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마스크를 벗으니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들이 보이고, 나는 이곳이 생면부지의 타지임을 잠시 잊었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다 어느새 나는 계획 없이 친구의 자취방에 도착해 있었다.


 마트에 가서 술을 사고, 먹을 간식거리를 챙기고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편한 옷을 빌려 입고 넷플릭스를 보며 간단히 술을 마셨다. 내 취한 모습을 보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친구는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다. 남은 친구와 웃으며 상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고, 남은 드라마를 더 보며 과자를 깠다. 잘 시간을 훌쩍 넘긴 밤이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계획을 세우며 지냈던 일상이 어그러지는 그 일탈이 너무 즐거웠다. 구구 절절하게 표현을 해가며 남기고 싶을 만큼 잊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그다음 날, 우린 참 게으른 하루를 보냈다. 나는 들어야 할 강의 두 개나 미뤘고, 친구는 실시간 강의를 켜놓고 딴짓을 했다. 셋이서 미적미적 뒹구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강의를 듣고 나서는 아예 이불에 등을 붙이고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여유로운 점심이 지나, 저녁이 오자 한 친구가 예기치 못하게 먼저 집을 떠났다. 마음이 아팠다. 즐거운 일탈이 서서히 막을 내리는 소리가 났다. 남은 친구와 초밥을 시켜먹고 묵묵히 짐을 챙겼다. 깜깜해진 길을 걸어 도착한 역 앞에서 아쉬운 인사를 건넸다. 애써 웃으며 또 놀러 올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지만 속이 씁쓸했다. 우리는 서로를 뒤로 하고 각자의 궤도를 돌기 위해 또 헤어졌다. 


 계획에 없던 일탈을 저질렀다. 그 속에서 내 쓸모를 증명하지 않고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아무런 부담도 걱정도 없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받고 왔다. 다시 홀로 지탱해야 하는 내 자리로 돌아와서, 잠시 그 일탈에 대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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