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 Mar 21. 2021

27. 용서하기 힘든 사람

아주 사소한 실수지만

 내게 살면서 정말 싫어해 본 사람이 있을까 하면, 물론 있다. 이유 없이 나를 괴롭혔던 아이, 내 꿈을 무시했던 선생님,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던 친구 등 살아오며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들을 많이 만났다. 큰 범법적 이유여서가 아닌 '나와의' 관계가 유독 아파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 그러나 정말 맹목적으로, 용서하지 못할 만큼 미운 사람은 아직 만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까지의 상처를 주는 많은 이들을 이젠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사소한 실수에 상처를 받게 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바로 나다.


 나는 나에게 신경질적인 편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라는 멋들어진 말이 있긴 하지만 내게는, 적어도 이 성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작은 말실수라도 할까 치면 밤새 이불을 차며 후회하고, 실수를 하는 순간 미간이 찌푸려지며 험한 말이 나온다. 이건 두말할 것 없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것이 맞다. 이것이 내 이익과 관련된, 예를 들어 성적이나 금전적인 문제와 관련되면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성적이 커리어의 전부처럼 여겨졌던 중등교육 시기에는 극에 달했었다. 중간고사에서 알면서 문제를 틀리는 실수를 했다거나, 수행평가에서 시간 분배를 잘못해 과제를 완벽히 완성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날에는 속으로 천불이 났다. 혼자 묵묵히 분을 삭이다 결국 눈물을 흘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우면서도 안쓰러운 옛 얘기지만, 그때는 정말 그 사소함에 진심을 다해 상처를 받곤 했었다.


 아, 지금은 사소함에 무던해졌다는 건 아니다. 그저 옛날에 비하면 덜 극단적인 마음을 가지게 된 정도다. 나는 여전히 작은 것에 상처를 입고 고민하는 시간을 살고 있다. 이 글의 계기가 된 일도 정말 사소한 실수였다. 최근 한 교양에서 들어야 할 강의가 아닌 다른 주차의 강의를 들어버렸다. 출석이 인정되는 기간도 아니었어서 강의를 들었다는 확인조차 않았다. 1시간을 통째로 날린 셈이었는데, 심지어 들어야 할 강의는 1시간보다 긴 강의였다. 마침 그날은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들과 외박을 한 날의 아침이었고, 친구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낭비됐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속으로 차오르는 화기에 이를 악물고 배속으로 강의를 들었고, 기어이 1시간이 되기 전에 강의를 마친 후 재빨리 이불속으로 몸을 던져 몇 분이고 누워있었다.


***


  웬만큼 큰일이 아니고서야 타인의 일에는 웃으며 넘어가면서,  왜 유독 내 잘못과 실수에는 이렇게 화가 솟구치고 짜증이 나는 건지. 다른 사람들에겐 형식상으로라도 쉽게 나오는 그 관용의 말은 왜 내 일이 되면 뾰족한 짜증이 되어 나를 찌르는지. 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웠건만, 정작 왜 자신은 그렇게 용서하기 힘든 걸까.


 아마도 그 기본은 잘하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실수하기 싫고, 여러 측면에서 더 완벽히 일을 처리하고 싶다는 마음. 무릇 아픈 상처와 습관은 순수한 소망에서 시작되는 법이니 말이다. 물론 이것이 건강하게 성장하면 자신을 성찰하고 긍정적인 삶을 설정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 경쟁과 순위, 실패와 질책이 더해지면 자신의 모난 부분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사회에서는 이를 '어른스럽다', '철저하다' 따위의 호의적인 관용구로 포장해 칭찬을 건넨다. 여기서 하나 말해두자면, 사회의 기준은 개인의 행복을 절대 보장하지 않는다. 그 기준은 자본주의적 경쟁구조의 영향을 받고, 이에 속아 극으로 치닫다 보면 어느새 자신은 발 디딜 곳 없는 벼랑에 서게 된다. 내가 그랬듯, 무한 경쟁에 떠밀린 오늘날의 많은 학생들이 그렇듯 말이다.


 사실 경쟁에서 벗어난다면, 실수와 실패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에 실패에 웃을 일도, 나의 실수에 분노할 일도 없다. 하지만 끝없는 경쟁 굴레 속에서 살다 보면 하나의 실수는 곧 나의 생존에 직결된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문제 하나를 틀리면 세상이 끝날 것 같고, 학교 생활을 다 망쳐버리는 것 같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또한 돌아보면 별 거 아니라는 것 또한, 다 지난 입장에서는 이해가 갈 것이다. 나 자신을 증오하고 탓하며 쉽게 용서하지도 못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현대인들에게 비슷하게 새겨진 흉터가 아닐까 싶다. 어떠한 명예도,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아프기만 한 흉터.


 자신에게 엄격한 것과 자신을 해하는 것은 한 끗 차이다. 나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나 자신이 나를 죽일 듯 미워하는 것은 어떤 방면에서든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살면서 새겨진 태도를 바꾸기란 쉽지 않고, 자신이 미워지는 순간은 항상 오겠지만 최대한 빨리 나를 용서하기로 하자. 나 또한 이를 목표로 하는 한 사람으로, 글쓰기로써 나의 미움과 결핍을 인정하며 오늘도 쓴다.



 추신: 실로 오랜만에 본글로 찾아오게 되어 참 반갑고, 조금은 멋쩍다. 긴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나 낯선 일이었다니, 며칠간 쓰지 못했던 문장과 문맥의 맺음새가 거칠어진 것이 신경이 쓰인다. 바빠진 탓에 쓰게 된 쪽글에는 나의 잡다한 일상밖에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읽는 누군가의 기대를 깨트릴까 조마조마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다시금 찾아와 주는 이들에게 뭉근한 감사를 전한다.

작가의 이전글 쪽글 3. 일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