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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Feb 01. 2021

4. 짝사랑

말 한마디에 울고 웃고

 12월 3일 수능을 마치고, 나는 코앞에 닥친 면접 준비를 위해 학교를 바삐 오가야 했다. 하지만 학교를 가는 버스는 얼마 없었고, 그마저도 3-40분의 배차간격을 가졌던 지라 나를 학교로 실어 나르는 건 아빠의 역할이었다. 아침마다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조수석에 타면 조용히 시동을 걸던 아빠는 언젠가 내게 넌지시 그런 말을 했다.


 "남자 친구는 대학 가도 좀 나중에 만나라"


 대학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괜한 오지랖으로 다가온 아빠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여러 대답을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괜한 싸움을 피하고자 나른한 아침의 잠 기운을 빌어 무던히 웃어넘길 수 있었다. 뭇 부모님들이 자식의 연애를 걱정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는 19년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누군갈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단지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내가 좋다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을 뿐. 오히려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항상 누군가를 좋아해 왔던 쪽은 매번 나였다.


 짝사랑: [명사]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일


 국어사전의 한 줄 뜻마저 쓸쓸해 보이는 이 단어는 도대체 몇 명의 사람을 몇 번이나 울렸을까. 딱딱하고 각진 한 권의 책이 이리도 쉽게 정의 내리는 이 행위는 무르다 못해 물컹하게 익어버린 마음에겐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처음에 혼자 겪는 열기로 모조리 녹아버린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성이 생기고, 몇 번의 충격이 가해진 뒤에는 탄력 있는 고무공처럼 변한다. 한 번은 내던져져도, 한 번은 녹아내려도, 또 한 번은 짓밟혀 찌그러지더라도 이내 원래 모양으로 돌아온다. 하루에도 수십 번 떨어지고 날아오르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그들의 마음은 충격에 익숙한 형태로 빚어지나 보다.


 그런 마음은 일정 시간 동안 열심히 구르고 튀어 오른다. 심장을 간질여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때로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사람을 조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홀로 감정을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 열심히 튀어 오르던 고무공은 이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이 홀로 무너진 마음은 새로운 사람에 의해 녹아내려 또다시 공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 악착같이 엉겨 붙어 새로운 형태로 피어나기 위한 번데기가 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보다 괜찮게 만들기 위한 쪽으로 굴러나간다.


 통통 튀는 고무공의 마음도, 생채기가 가득한 낡은 공의 마음도, 산산조각 나 가루만 어루만져야 했던 마음도 가져본 나는 요즘, 뜨뜻 물렁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의 풋풋한 2년간의 짝사랑을 갈무리하며 흠집이 가득 난 마음을 새롭게 꾹꾹 빚어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마디 말에 날고 추락하기를 반복했던 마음의 무게를 영점으로 돌려놓고, 이전보다는 조금 더 강한 것이 되기를 바라며 생각이 날 때마다 다독이곤 한다.


 사랑에 있어 쉽고 싶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저 가벼운 나를 닮지 못한 마음을 챙기는 게 습관이 되었다. 자기가 행복할 때도 종종 웃지 못하고, 슬플 때도 제대로 우는 소리 한 번 못 내는 사람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꼴을 보며, 내 마음은 얼마나 한심스레 생각을 할까 싶다. 하지만 어쩔까, 뻔한 변명처럼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맘을 따라주지 않는 내게 끌려가면서도, 다른 누가 돌보아 주지 않는 나를 스스로 감싸 달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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