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신주쿠 교엔을 걸으며 한 생각

by 심지연




벚꽃 잎이 떨어지면 대책 없이 설레기 시작한다. 곧 초록색 잎이 자라난다는 신호이니까. 나는 계절을 지날 때마다 모든 계절을 펼쳐 열심히 순번을 매겨 본다. 그럴 때마다 여름에게 한없이 고고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여름의 뜨거운 더위와 습도까지 끌어안고 싶진 않단 말이지.



밤새 비가 내려 더욱 습한 아침, 나는 연한 올리브색 긴 셔츠를 입는다. 여름의 풀색과 비슷해 좋아하는 셔츠다. 커피를 마시고 문구점을 구경하는 사이, 비가 쏟아졌다 그쳤다 날씨는 변덕을 부린다. 그 덕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에는 숨이 막히도록 물기가 가득하다. 도쿄 전체를 돌돌 말아 온 힘을 다해 말끔하게 쥐어짜 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신주쿠 교엔(공원)의 티켓은 정사각 모양이다. 그곳의 풍경 사진이 박혀있어 얼른 일기장에 붙이고 싶어진다. 얇은 종이 재질이라 쉽게 찢어질 것 같아 바지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은 평일의 공원엔 나처럼 여행 일정 타이밍 못 맞춘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첫인상은 관리가 잘 된 여름의 넓은 공원. 걸을 때마다 좋은 곳에 와있다는 자부심이 든다. 이곳저곳을 통과해 작은 정자에 도착한다. 여기서 바라보는 호수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나도 다른 여행객 사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키가 큰 어두운 카키색 나무들이 빼곡히 공원을 감싸고, 그 안으로 민트, 연두, 올리브 등 세상 모든 초록 계열의 나무들이 다른 모양을 한 채, 움직이지 않는 그림 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호수는 나무들로 인해 아주 진한 녹색이 비치고, 나는 본 적 없는 영화 <기쿠로지의 여름> 속 유명한 음악, summer를 재생하고 싶어진다. 공원을 찾은 다른 사람들도 여름의 녹음에 취해있다. 나 또한 이 아름다운 풍경을 계속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나란히 앉아 한참이나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뭉클하게 느껴졌다. 주체할 수 없는 미운 날씨마저 이기는 건 여름에만 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일 테다. 걸을 때마다 나무 사이에 비를 머금은 물방울이 떨어져 옷은 금방 축축해지고, 높은 온도 때문에 금세 땀범벅이 되었지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한다.



공원을 조금 더 걷다가 한적한 벤치에 앉아 가져온 시집을 펼쳤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공원의 색을 꼭 닮은 표지다. 여행에선 대체적으로 말랑하고 모호한 형태의 어여쁜 글을 읽고 싶었다. 그리고 조건 없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계획 없이 일을 그만둔 게 내 잘못은 아니라고, 나만 빼고 다 이상한 거라고,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되기 전에 나올 수 있던 건 신이 도운 일이라고. 단 한순간도 나 자신을 자책하지 못하도록 터무니없는 명분을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여행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보상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그만둔다는 것, 인생의 대소사로 따지면 그다지 대단한 사건은 아닐지 모른다. 다만 내 손으로 가꾼 모든 것들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큰 탓이다. 통계적으로 내 사주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일궈야 하는 자업자득 사주라는데, 그래서일까? 나는 작은 관문 앞에서도 자주 넘어진다. 고작 넘어지는 일에 엄살 피울 수 있는 삶이 언제까지 허락될지는 모른다.



몫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덜 미워하게 될는지도
이제는 조바심 내지 않는다
기차는 길고 길다는 건
기차의 몫이 그러하므로 어떻게든 계속 가야 한다는 뜻

(116p. 몫)



어느새 공원에 머문 지 두 시간이나 지나있다. 이곳을 꽤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돌아볼 곳이 더 남아있다. 마음 같아선 해가 질 때까지 머물고 싶지만, 저녁에 찜 해놓았던 재즈 바에 가기 위해선 이곳을 떠나야 한다. 출구를 찾아 빙빙 돌아 공원을 나오는 길, 하트 모양의 나뭇잎을 발견한다. 소마이요시노라고 적혀있다. 검색해 보니 ‘왕벚나무’라고 하는데, 검색된 이미지 어디에도 하트 모양 잎 사진은 찾을 수 없는 걸 보니 번역이 잘못되었나 보다. 그래도 귀여운 것을 보아 기분이 좋아졌으니 이름이 무엇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온종일 땀을 흘리고 식히는 일을 반복했더니 바람이 불 때마다 끈적한 촉감이 스친다.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어 그대로 이동하기로 한다. 여름은 높은 불쾌지수와 맞먹는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사랑보다는 애증에 가까운 감정. 그러고 보니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계절은 늦봄이다. 나는 요즘 매일 밖을 나설 때마다 설레고 있다. 울창한 초록의 계절이 다가오는 것이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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