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초 여행에선 유난히 불특정 한 나를 발견한다
학창 시절 4년간, 일본어 수업을 들었지만 일본에 여행 올 때마다 파파고에 의지하고 있다. 짧은 의사소통은 그럭저럭 되는데 서점에만 오면 아쉬움을 모아 탄식을 하며, 후회한다. 아아. 제목이라도 읽을 줄 알았다면.
나는 인터넷에서 발견한 어떤 사진 한 장 때문에 진보초 역 여행을 결심했다. 보도블록 위에 낡은 책을 전시해 둔 나무 책장 사진이다. 덧붙여진 설명엔 오래된 고서점 거리라고 쓰여있다. ‘오래된’, ‘고서점’ 같은 단어는 애서가를 금세 설레게 만든다.
오후 네시, 카레가 맛있기로 유명한 식당에서 늦은 첫 끼를 해결하고 나니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킷사텐을 찾아 걸어가던 중 작은 서점들이 발걸음마다 걸린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워 몇 군데 들러본다. 낡은 LP를 저렴한 가격에 팔거나, 직접 만든 엽서나 스티커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곳도 있다. 그 사이에서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세월의 흔적만큼 바래진 책과 책장들. 뭐든 쉽게 모방할 수 있는 세상에서 금방 따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일 테다. 세월을 모방하려면 그만큼의 세월을 정직하게 건너는 방법밖엔 없다.
밀롱가 누에바. 탱고가 흐르는 킷사텐이라고 한다. 이곳에 관해 좀 더 찾아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도 여러 번 들렀다고 하는데, dug에 이어 어쩌다 보니 하루키를 따라 도쿄를 여행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인천 공항 서점에서 산 신간 <허송세월>을 조금 읽다가, 일기장에 방금 다녀온 신주쿠 교엔에 관한 감상을 세장이나 썼다.
값비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탱고 음악이 귀를 춤추게 한다. 언젠가 앙드레 브라질리에 전시에서 본 탱고에 관한 정열적인 작품이 떠오른다. 빨간 배경에 피아노가 놓인 그림엽서를 사 왔었던가. 그날 도슨트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여인의 향기> 속 대사에도 진하게 반했었다.
탱고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단순하죠. 그게 탱고가 위대한 이유예요. 만약 실수하면 발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
탱고를 아는 사람이라면 삶에 기어코 태어나고 마는 실수마저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리라. 집 떠나 타국에서 꺼낸 기억들이 마음의 방향을 정해준다. 마음은 기억을 따라 느긋한 산책을 한다.
서울에선 서점에만 가면 구경하느라 발이 묶여 계획한 시간을 넘쳐 쓰기 마련이었다. 그러는 도쿄에선 서점 구석구석을 보는 일도 생각만큼 흥미롭진 않다. 역시나 번역에 한계가 있어서다. 킷사텐을 나와 땅거미 진 골목을 걷는다. 작은 술집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거리에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인적 드문 골목을 쏘다니다 한 서점에 들어간다. 좋아하는 일본 소설의 원서를 기념으로 사 볼 작정이다. 귀여운 그림책도 발견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찾았지만 재고가 없었다. 여행에도 들고 온 에쿠니 가오리 <낙하하는 저녁>도 찾는 데에 실패. 하는 수없이 우연히 발견한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을 샀다. 본격적으로 문학을 좋아하기 시작한 중학생 시절을 책임져준 추억의 책들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는 일이 좋았다. 원하는 만큼 책을 살 수도 없던 학창 시절, 집 앞 도서관 종합자료실, 나의 단골 코너는 <파페포포 메모리즈>가 꽂혀있는 책장이었다. 내 일기장엔 주로 거기서 발견한 감성적인 문장이 쓰여있다. 사춘기의 예민한 마음을 달래기에 그만한 책도 없었다. 가네시로 가즈키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시작으로 많은 종류의 일본 소설도 읽게 되었다. 우연히 교과서에 나온 한국 소설을 발견하면 어쩐지 짜릿한 마음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라 인터넷에서 추천받은 책 제목을 종이에 적어놨다가 다음 날 도서관에서 찾는 식이었다. 그런 게 아니면 오로지 책 표지에서 오는 감을 믿고 대여를 해야 했다. 그렇게 발견한 책 중에선 지금은 절판된 <아임 소리 마마>가 기억에 남는다.
책장 따라 계획한 진보초 여행에선 유난히 불특정 한 나를 발견한다. 큰 구경거리는 없어도 이곳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든다. 신주쿠나 시부야 같은 대도시의 번화가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역시나 마음이 동하는 곳은 작은 동네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직장인들이 눈에 띈다. 한여름에도 긴팔 셔츠와 재킷을 갖춰 입은 사람들 사이로 여행자 신분인 것이 기분이 좋다. 지하철이 도착하는 안내와 함께 거칠고 미지근한 바람도 스쳐 지나간다. 내일 외출할 땐 <낙하하는 저녁>을 들고 나와야겠다고 계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