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마음이 젖는 속도

매일 우에노를 떠나 우에노로 돌아온다.

by 심지연



1.

5일간 머무를 숙소의 위치는 우에노 역 근처에 있다. 그는 도쿄에서 우에노를 가장 좋아하는 동네라고 소개했었다. 내가 한 번도 안 와본 동네에 다섯 밤이나 머물러야겠다고 계획한 이유는 이것이 전부다.



이별한 지 3년도 더 지난 사람을 여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건 미련일까, 짝사랑일까? 우리가 연인이었을 때, 나는 매일 그가 내게 주는 애정의 크기를 채점하는 데에 혈안이었다. 사귀는 내내 연인이라면 응당 주고받아야 할 다정함의 정도라도 정해져 있는 것처럼 굴다가 내 풀에 지치고 만 것이다. 헤어지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연락하는 쪽도 대부분 나다. 그리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만난 거였지만 애인이라면 조금 다를 줄 알았던 거지. 그만큼 나를 사랑하지 못했거나.



체크인을 하기 전 커피 카츠라(coffee katsura)라는 킷사텐에 가보기로 한다.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발견한 곳이다. 오래된 중고 책이 진열되어 있는 창가 석은 만석이고, 카운터 석 엔 너저분한 짐들이 널브러져 있다. 나는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한다. 번듯한 앤틱함을 갖춘 다른 킷사텐과 달리 영업용 냉장고 안이 훤히 보이는, 가정적이고 정감 가는 곳이었다. 타인의 ‘거실’에 입장해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다른 데보다 저렴한 모닝세트가 눈에 띈다.




2.

밤부터 폭우가 쏟아지더니 아침이 되어도 그칠 줄 모른다. 빗소리에 일찍 눈 떠진 아침, 모자를 눌러쓰고 커피 카츠라에 간다. 한번 와봤던 곳이라고 휴대폰은 가방에 넣어둔 채 거리를 걷는다. 지도를 안 보고도 원하는 곳으로 도달할 줄 아는 여행이 좋다. 첫날 봐두었던 창가 자리에 앉아 비 내리는 걸 감상하며 샌드위치와 따듯한 커피를 기다린다. 초코 케이크도 하나 시켰다. 이른 아침엔 노년의 손님들이 많다. 작게 흐르는 클래식, 따듯한 물수건, 빵 사이 퐁신한 계란… 찰박거리는 빗물에 발이 다 젖었어도 마음은 뜨끈하다.



그와 함께 왔다면 어땠을까? 그럼 여행 내내 지도를 켜는 일은 없었을 테지. 신주쿠역에서 길을 잃는 일도, 소통 실수로 똑같은 메뉴를 엉뚱하게 두 개나 시키는 일도 없었을 거다. 늘 끊길 줄 몰랐던 서로의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밤을 새웠던 것처럼 책 읽을 여유 같은 건 없었을지도... 인생이 왜 이렇게 안 풀리냐며 투덜거리는 내게 엄살 피운다고 딱밤을 때렸을지도 모른다. 좋기만 했던 여행이었지만 그와 함께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쉬운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3년간, 지금만큼이나 그가 그리웠던 적은 없다. 마음은 물안경을 낀 것처럼 작은 물살에도 일렁인다.



3.

하루 종일 다른 동네에서 여행을 하고 우에노로 귀가한다. 매일 우에노를 떠나 우에노로 돌아온다. 그에게서 떠났다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는 기분을 반복한다. 밤 9시, 우에노 역에서 내려 티비 프로그램에 나와 한국인에게 유명해진 시장 안 이자카야를 찾아 간단한 요깃거리와 맥주를 시켰다.



우에노를 본격적으로 여행해 본 적 없어서일까? 이곳 우에노는 다른 번화가보다 좀 더 동네적이다. 최신 가요나 브랜드 간판으로 뒤덮인 쾌적한 번화가와 달리 작은 불빛과 언성 높은 말소리가 북적이는 골목. 가게 야외 좌석엔 한여름에도 긴팔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거나하게 취해있다. 건물 가까운 지상으론 전철이 달린다.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골목으로 진동이 울린다. 철컹 철컹 철컹… 전철이 달리는 소리는 소음이 아닌 동네를 위한 합주같이 들린다. 이곳에선 다 같이 흐트러진 자세로 풀어져 있을 것만 같다. 서울로 치자면 을지로와 비슷할까, 이십 대에 자주 가던 수원역 근처 밤거리도 떠오른다. 맥주 두 잔을 마시고 취기를 느끼며 숙소로 귀가한다. 후텁지근한 여름 밤거리 사이로 헛헛함이 비집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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