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으로 여행을 기억한다.
여행을 위한 짐을 챙길 때 가장 오래 걸리는 일은 여행지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다. 특히 혼자만의 여행이라면 책장 앞에서 더욱 신중해진다. 책은 동행자만큼 중요하다. 나는 종종 책을 읽기 위해 동행자 대신 혼자 떠나기를 택하기도 한다.
취향이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나 같은 사람은 가져갈 책을 단숨에 고르기 어렵다. 게다가 그동안 미뤄왔던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로 계획한 상태이기에 무작정 눈에 보이는 책을 가방에 쑤셔 넣는 충동은 자제한다. 나는 평소답지 않은 주도면밀한 자세를 갖춘다. 마음이 어디에 동할지 모르기에 장르와 주제를 오가며 책과 책 사이를 조합해 보는 것이다.
여행지에 따라 고르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도시를 종일 이동하는 식의 여행이라면 시간을 쪼개어 읽어야 하기 때문에 되도록 오랜 시간 이입해야 하는 장편 소설은 지양하고, 작고 얇은 책 위주로 범위를 좁힌다. 조금씩 읽어도 금방 몰입할 수 있는 종류의 책이어야 한다. 중도 포기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을 하거나, 너무 논리적인 책도 피한다. 문장이 화려한 책일수록 더 많은 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시집은 필수로 고른다. 나는 여행을 대비해 작은 판형의 출판사 민음사 쏜살 문고나 범우사의 범우 문고 시리즈를 주기적으로 구비해두고 있다. 좋아하는 소재는 독서나 글쓰기, 재즈에 관한 산문집이다.
휴식을 목적으로 한 군데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이라면, 두께나 장르를 고려할 이유가 없어진다. 나는 여행을 기회 삼아 완독을 벼르고 있던 장편 소설이나 평소 잘 안 읽혔던 인문학, 언젠가 읽어야지 소망만 하고 책장에 모셔둔 책들을 소환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뜬다. 등장인물 이름이 길고 어려운 세계 문학 전집도 해당한다. 여행지와 상관없이 시집은 거의 매번 가져간다. 가져온 모든 책이 다 싫증 나면 읽을 최후의 보루다.
가져간 책을 모두 읽고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여행 가기 전 부푼 마음엔 욕심이 앞서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처럼 진지하게 선정한 여러 권을 두고 기내용과 수화물 용으로 구분하면 준비는 끝났다. 이 단계쯤 오면 이미 자정이 지나 있지만, 책을 읽다 여행지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문장을 맞닥뜨리는 상상을 하면 책을 고르느라 허비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첫 도쿄 여행은 고작 두 밤 짜리, 가방에 챙겨간 책은 다섯 권이다. 짧은 일정을 고려해 모두 얇은 책으로 챙겼건만, 그중 절 반은 펼쳐보지도 못했다. 필사용으로 챙긴 릴케의 서간집, 재독 욕심이 난 시와 산책은 성실히 읽어왔다. 사나운 애착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조금 읽다 잠에 들어버린 후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펼쳐본 일이 없다.
못 읽은 나머지 두 권은 모두 소설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소설을 읽는 것이 다른 장르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깊은 성취감을 느낀다고 믿고 있다.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상태라는 건, 나 아닌 다른 이야기에 이입할 수 있다는 거니까. 마음이 넉넉한 상태라는 뜻일 테다. 두 밤의 도쿄 여행에선 즉시 감상에 빠질 수 있는 산문 두 권만 읽어온 걸 보니 내면이 다른 잡념으로 가득했었나 보다. 이처럼 때때로 여행지에서 읽어온 책들을 점검하며 내 마음이 어떤 지점에 와있는지 진단할 수도 있으니, 도무지 대충 고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도쿄 여행은 무려 다섯 밤 짜리, 나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책을 가져가기 위해 책장 앞에서 더욱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무렵 글을 쓰는 일이 막막하게만 느껴져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근본적인 고민에 빠져 있었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글쓰기를 멀리하고 있는 동안 전과 달리 서사나 구성에 얽매이지 않는 추상적인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그 마음에 불씨를 지펴준 책이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였다. 사실보다는 감정이 주가 된 책 들이라고 무조건 마음이 향하는 건 아니었는데, 당시 내 마음과 책과의 주파수가 딱 들어맞았나 보다. 출퇴근하며 아껴 읽다 도쿄에서 마무리를 했다. ‘마음이 부는 곳’은 지난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발견한 따끈한 신간, ‘변방의 언어-’와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책이었다.
소설을 읽는 일도 성공했다. 첫 도쿄 여행에서 실패한 사강의 소설과 다시 읽고 싶은 추억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도쿄에서 모두 읽었다. 여름 여행에 계절의 내음을 풍기는 산문과 시집을 읽는 건 관례 같은 일. 하루키 소설은 자주 챙겨 다니지만 세계관을 이해하기까지 진입장벽이 높아 족족 실패한다. 출발하는 날, 공항 서점에서 발견한 허송세월과 지하로부터 수기는 첫 장은 넘겼지만 완독에는 실패했다.
여행 첫날, 나는 우에노 역 근처 작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낡은 창가에 책들을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매일 아침, 종일 가방에 넣고 다닐 책을 고르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싶어서였다. 하루의 동선을 정하고 나면 창가를 바라보고 서서 오늘을 동행할 단 두 권의 책을 신중하게 선정하곤 했다. 장르와 소재가 겹치지 않도록 고르는 건 기본, 새 책과 읽고 있는 책을 조합하는 건 실패를 줄이기 위한 경험적 본능이다. 여행과 독서의 경험이 누적될수록 나이테처럼 깊어지는 나만의 방식이 나를 더 고유하게 만드는 것 같다.
누군가는 여행할 때마다 그 도시에서 향수를 사서, 돌아와 그 향기로 여행을 추억한다는데. 나는 책으로 여행을 기억한다. 동행했던 책을 다시 펼칠 때마다 그날의 공기와 풍경, 마음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그리하여 여행할 때마다 가져간 책들을 이처럼 성실히 기록해보고 싶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