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이뤄지기 힘들고,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매일 꿈을 꾼다. 가끔은 꿈을 꾸면서 꿈속이라는 걸 안다. 그런 날엔 수면 시간이 길어도 자고 일어나면 개운한 느낌이 없다. 꿈에서 생각도 하고 마음도 써서 그런 걸까? 누군가에게 쫓길 땐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땐 꿈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느라 자면서도 바쁘다.
어젯밤, 딱 그런 꿈을 꾸었다.
나는 터미널에 서 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그를 발견했다. 그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철 지난 캡 모자를 쓰고 투박한 모양의 G-SHOCK 시계를 차고, 심드렁한 말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마저. 나는 집에 가려던 계획을 잊어버리고 그가 하자는 대로 터미널을 나와 걸었다. 우리는 발걸음을 맞춰 걸으며 과거에 수없이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했다. 나는 그의 중저음 목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내게 여전히 새로운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를 만나지 않은 수년간의 공백을 비웃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과 달리 내게만 집중하는 그의 시선이 믿기지 않아 꿈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함께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절망적인 적이 없었구나. 나는 서로에게 실망하지도, 이별하지도 않을 수 있는 이 꿈속을 가능하면 오래 머물고 싶어 하지만 곧 잠에서 깬다. 아직도 당신과 이별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뭉그적거리다 정오가 다 되어 숙소를 나선다. 길몽인지, 악몽인지 모를 이상한 꿈, 도쿄 여행을 핑계로 요 며칠 그에게 자주 연락한 탓이다.
숙소에서 나와 햇빛을 정통으로 맞으며 우에노 역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쭉 걷는다. 건물 사이 정면으론 키가 큰 탑이 보인다. 나는 탑과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에서 보았던 스카이 트리다! 지도엔 숙소가 있는 우에노에서 스미다 강이 보이는 아사쿠사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뙤약볕을 피해 지하철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굳이 길을 걸으며 공상을 즐기고 싶다. 더운 날씨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도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절, 센소지에선 저렴한 가격으로 운을 점칠 수 있다. 100엔을 넣고, 소원을 빌며 통을 흔들어 운세 막대기를 뽑는 방식. 행운이 나오면 집에 가져가고, 불운이 나오면 옆에 배치된 ‘대’라는 기둥에 묶어 두고 가면 된다. 오늘 내가 뽑은 운세 종이엔 이렇게 적혀있다. 소원은 이뤄지기 힘들고,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신이 정말 내 꿈까지 들여다보는 걸까? 나는 종이를 대에 묶고 절 안으로 들어간다.
절 안엔 금처럼 빛나는 황금색의 무언가가 번쩍번쩍 빛난다. 사람들은 한 군데 모여 동전을 던지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북적거리는 이곳을 그냥 나가려다가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따라 동전 몇 개를 던져보았다. 그리곤 두 손을 꼭 모아 눈을 질끈 감았다. 간절히 바라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만다. 십여 년 전, 혼자서 통영의 이름 모를 절을 찾아갔던 기억도 떠올랐다. 종교는 없었지만 신에게 기대어 비밀을 고백하고 싶었다. 처음 가보는 먼 도시, 산속의 절이면 적당할 것 같았지. 막상 절을 올리는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액체가 왈칵 쏟아져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며 그곳을 빠져나왔었다. 돌이켜보니 그때도 지금 같은 한여름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스미다 공원을 걷기에는 무리라 근처에 머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익숙하게 킷사텐을 찾는다. Coffe shop celine. 청록색의 낮은 의자, 배경음악 대신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캐주얼한 곳이다. 빗소리를 듣고 싶어 카운터 석이 아닌 창가 석에 앉아 커피를 주문한다. 스미마셍! 아이스코히 쿠다사이. 미르크, 시러브 다이죠부데스.(우유와 시럽은 괜찮습니다.) 문법에 맞는 문장일지는 모르지만 대충 의미는 통한 것 같다. 나는 책을 읽는 대신 일기장을 꺼내 방금 센소지에서 빌었던 소원을 다시 적는다.
고블렛잔에 담긴 까만 커피가 금방 배달되었다. 앞 좌석엔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옆 좌석엔 서양인 두 명이 파스타를 먹고 있다. 한 바닥, 오늘의 마음을 와르르 쏟아내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하교 중인 학생들이 지나간다. 길거리엔 더 이상 우산 쓴 사람들은 안 보인다. 금방 지나가는 소나기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