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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Feb 14. 2022

시어머니의 결혼선물, 쿠쿠밥솥

아들이 준 상품권으로 사준 건 안비밀

불같은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한방에 결혼하고 한방에 아기 낳고 얼결에 아들 둘

코로나 등장으로 24시간 풀가동 꼬봉이 된 내게는 가물가물하기만 한 그것,

그것을 그것이라 믿었다 내가 지금 이모냥 이 꼴이 되었지.)


32년 모쏠 시대를 접고 드디어 남자 친구가 생긴 나는

잘 생긴 남자 친구의 얼굴 하나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

모쏠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같잖은 연애 훈수를 두곤 했는데

특히 내가 좋아하던 0주가 그보다 8살 연상의 대머리 아저씨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친구의 두 손을 꼭 잡고 "0주야, 이 결혼 꼭 해야겠니"라며 말렸는데

역시 사람일은 모르는 것.

몇 년 뒤, 나 역시 7살 연상의 (다행히도 머리숱은 풍성한) 아저씨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다며 끝까지 뜯어말린 지인(?)들을 뒤로 한채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그 남자의 뒤로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 가 등장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건 그의 집안 식구들의 아우라이자,

"꺼져, 이 빙구야"라고 일갈하는 그의 사랑하는 원가족이었다.


처음 글을 썼다 폭발적인 조횟수에 식겁해(혹시라도 그 냥반이 읽었다가 상처받아,

그래도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이 상처받을까 봐)

글을 없애버린 쫄보(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는데, 대체 이 계약관계는 언제나 끝이 날까)인 나는

이 결혼생활에 할 말이 조금 있다.

아니 사실 엄청나게 많은데,

당사자들과 직접 대면은 불가하고

그들을 만나게 해 준 장본인이자 그들과의 연결고리인 그 남자와는 이 분야의 이야기 시작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임을 알기에 입을 꼭꼭 닫아버렸다.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러자니 가끔 욱, 하고 저 단전 밑에서부터 그동안 받은 핍박 같은 구박과 부조리한 온갖 시집살이들이

무엇이라도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피어 올라

다짐했다.

정리하고 털어버리기를.

쪽팔려서 친구들에게도 털지 못한 비루한 나의 대단한 시집과 관련 인물들에 대해 탈탈 털며

이렇게 그 남자와 그자들은 모르는 공간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아니

"이 시베리아 벌판의 허스키 같은 베이비들~~~~ 어쩌고 저쩌고" 하면 내 속이 좀 아물지 않을까 싶어

선택했다.

다시 말하지만, 살기 위해 쓰는 거다.


남자 친구는 서른아홉,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7살 연상,

우리는 개털이었다.

둘이 합해 전재산 2천만 원으로 결혼하기로 했다.

남자 친구는 살던 집 전세금을 빼서 부모님의 새 아파트 이사에 보탰고,

그것으로는 부족해 대출을 더해

아프신 아버지와 세련된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리고 대출금과 이자를 오롯이 혼자 감당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기도 돈이 없어 회사 대출을 가득으로 당겨 친구와 형제에게 빌려준 상태였다.

나를 만나기 전의 일이다.


집의 대출금뿐 아니라  

아버지의 휴대폰, 병원비를 비롯해 어머니의 용돈까지 모두 효자인 그 남자의 몫이었다.

그 남자의 아버지는 "대체 왜 장가를 가지 않느냐"라고 물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결혼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맞다. 그는 그 집안의 기둥이었다.

남의 집 기둥은 빼오지 않는 거라 했던가.

집은 같이 대출을 받고

신접살림은 친정식구들의 도움으로 대충 해결했다.

없는 살림에 딸 결혼한다고... 도움 준 친정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


그 남자의 형은 축의금으로 30만 원을,

(그 남자는 형 결혼할 때 양복을 받았다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당시 친구에게 돈을 떼이고 괴로워하던 남편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돈이 없어 거절했음에도

아이들 학원 보내야 한다고, 끈질기게 부탁하는 피붙이를 외면하지 못해 대출받아 돈을 빌려주었고,

"이자는 내가 내줄게"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자는커녕 단 한번 묻지도 않았다고 했다.

지금도 그 이자를 내고 있다. 가끔 울화통이 터진다.

일단 기본적으로 빌려간 돈에 대해 일언반구 없는 사람에 대한 신뢰는 제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담화 전문이라고 해도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있기 전의 일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 구역의 일은 아니었으나,

지금 살림을 하고 있는데 매달 그 이자가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자면... 아깝다.

저 돈이면 새끼들 뭐라도 하나 더 해줄 수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갚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냥 입을 싹 씻으면 될까?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입을 씻으면 어찌 될까?

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졸업했다.

부모님은 첫 학기 등록금만 해결해주셨다.

딱 한번 해외출장과 겹쳐 대출이자가 빠져나가는 날짜를 하루 밀린 적이 있는데,

그렇게 많은 국제전화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제1금융이었는데도...... 그래서 안다.


남자 친구의 친구는 그의 결혼 소식을 접하곤 한 달에 20만 원씩 나누어 돈을 갚아주었다.


당장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갚을 생각이라면 은행에서 빌려라,

아는 사람에게 그냥 빌려달라는 건 나 지금 졸 급하니까 그냥 달라는 뜻이다.

특히 혈연관계에서의 돈거래는 더더 위험하다.

물론 내가 월급이 없어도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몇백 쯤이야, 하고

더더 부자라면

몇 천 쯤이야, 하고 줄 수도 있겠지.

그래, 나야. 부디 좀팽이처럼 기천만원에 속 끓이지 말고 부우우우우우자가 되어

그깟 돈쯤이야, 하고 훨훨 털어버렸으면 좋겠구나. 다음 생 말고 이번 생에서.


캄다운.


그 남자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시부모님은 선물을 하나 해주셨다.

쿠쿠 밥솥.

맞벌이지만, 밥은 잘해 먹고 다니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친구들이 시댁이 어쩌고~~ 라며 서운함을 말할 때

내 쿠쿠밥솥 이야기 하나면 그네들은 모두 표정이 편안해지곤 했다.


결혼선물로 밥솥 주는 시어머니,

정말 쿨하지 않은가?

아메리칸 스타일이 이런 것인가?

사실 나는 좀 설레기도 했던 것이

이렇게 쿨한 어른이라면 앞으로의 시집생활도 좀 리버럴(?) 하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리버럴은 개뿔.


둘이 알아서 하는 결혼이었기에 시댁의 도움은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야 어머니가 새 이불을 바랐다는 것을 알았고

왜 얘기하지 않았냐고 묻는 내게 남편은 "그럼 결혼 못할 것 같았다"라고 순박하게 답했다.

이불은 하지 않았지만 양가 부모님께 맞춤양복과 코트, 그리고 한복을 맞춰 드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잘했다 싶다. 부모님께 또 언제 옷 한 벌 맞춰드리나.


자유로운 영혼의 남편과 리버럴 한 시어머니 틈 사이에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남편은 경상도 양반가문의 자제였다.

내가 사대부 집안에 시집을 가다니!

오. 통재라.

제사도 경상도식(?)으로 지내고

평생 친정엄마가 제사 지내는 걸 봤지만 병풍을 치는 건 처음 봤다.

.... 제기며.... 무튼


그렇게 나는 병풍도 있는 집안에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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