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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Feb 19. 2022

네, 저는 아가리어터입니다.

살찌는 병에 걸린 사십 대의 다이어트사(史)  part. 1

나는야 행복한 돼지, 꿀꿀  <사진, 픽사베이>



만 나이로도 마흔이 넘었습니다. 

마흔을 불혹이라고 한다지요? 

'미혹되지 않는다'라고 풀이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제 그 어떤 다이어트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저를 다이어트의 세계로 이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꿀꿀.


하지만, 불혹이 되기 전까지

저는 무수히 많은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열두 살 에어로빅을 시작으로 둘째 아이를 낳고

모유수유로 자동으로 홀쭉해지기 전까지

(물론 지금은 다시 소싯적 무게인 80kg이 되었습니다)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습니다. 


세끼만 먹고 간식 안 먹기+한약(환약 말고 진짜 한약 먹었습니다)

평생 안 먹을 음식을 골라하면 효과 직빵인 원푸드 다이어트,

고기만 먹는 황제 다이어트,

효과 제대로 본 덴마크 다이어트,

현미 채식,

저탄 고지 키토식,

단백질 파우더,

생식,

그리고 단기 단식까지.


네네, 종류별로 기분 별로

온갖 다이어트를 섭렵했습지요. 

하지만 근본적인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떤 다이어트이건 간에

내 몸은 나의 최고 몸무게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저는 키가 큰 편입니다. 173cm에 기골이 장대합니다. 

짝남 학교로 미학(우리 학교에는 미학 강의가 없었습니다) 청강하러 갔다

화장실에서 "남자가 여자화장실에 들어왔냐"며 미화원 여사님께 쫓겨난 적도 있지요. 

슬픈 나의 20대. 운전면허 시험 말고 붙은 시험이라곤 없는..... 나의 20대.

게다가 몸무게가 80kg쯤 나갔으니.

학식도 못 먹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지요. 


아무튼 시작은 좀 더 이릅니다. 

열두 살이었어요. 

사춘기가 왔는지, 그때 살이 엄청 쪘어요. 갑자기.

어렸을 때는 분명 마르고 볼품없는 몸매의 아이였는데,

열두 살을 기점으로 아주 풍성한 몸매를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같은 반 아이와 사이가 틀어져

영문도 모르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요. 


처음이었어요. 

그전까지 아마도 나는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미움받는 것 혹은 사랑(인정)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피부로 알게 되었지요.

저는 제법 괄괄한 성격의 (별명이 슈퍼탱크(?) 였던 기억을 되짚어볼 때) 아이였는데

...

매일 아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20분을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개근상, 그것도 모자로 중고등 12년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게 참 자랑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꾸역꾸역 갔나 몰라요. 

힘들면 좀 쉬고, 빼먹고 해도 되는 건데.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몰랐거든요. 학교는 무조건 가야 하는 걸로 알았어요. 

고작 열두 살짜리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무엇인가가)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에

그렇게 익숙해졌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무섭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는 가재, 게, 붕어로 사육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드네요. 


무튼,

그때부터일 거예요.

나와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열두 살에서 열세 살로 넘어가는 겨울방학, 

동네 에어로빅장에 등록합니다.

<우뢰매>에 나오는 심형래 아저씨 여자 친구(이름은 생각나지 않아요)가 입던 옷 같은

딱 달라붙는 촌스러운 색의 엄마 에어로빅 옷을 입고

아줌마들과 함께 신나게 흔들었지요.

밥도 세끼만 먹었어요. 

7시 이후에는 물도 안 마시고요. 


왜 다이어트를 하게 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에어로빅을 하고 밥을 세끼만 먹었어요. 

세상에.

겨울 방학이 끝나자 43kg가 되었어요.

키는 160이 넘어갔는데

내 인생에 그렇게 마른 몸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3이 되기 전까지 완곡한 상승 그래프를 그리던 몸무게는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던 겨울부터 급등합니다. 

따상이었죠.

교복 치마 단추와 함께 사지를 연결하는 부위를 비롯해 온몸 구석구석에 튼살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임산부들이 배가 트고 하면 우울해진다는데, 10대부터 단련받은 덕분에 그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었죠.)


그렇게 꽃피는 스무 살,

아빠 옷을 입고 대학에 갑니다. 

재수까지 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다 떨어진 패잔병으로 

20대를 시작했습니다.


이십 대의 시작이 80kg라니,

근데 그래도 대학 생활은 너 모너 모 재미있고 신났다는.

사랑하는 디오니소스들, 잘 살고 있겠지.


동기들과 현상을 맡기고는 충무로 초입 주차장에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지요.

아무나 걸려라. 

교수님이라도 만나는 날은 계 타는 날입니다. 

작업실 선배들을 만나는 날도 계 타는 날이지요. 

네, 거의 매일 계를 탔습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80~83kg를 유지했죠.

삼각김밥도 안 사 먹었었어요. 이따 술 마셔야 하니까.

정품 대신 마끼 필름으로 절약하며

인화지는 젤 싼 알씨로,

파이버는 그때그때 젤 싼 걸로,

테스트는 인화지를 잘라 쓰며

하루를 마감할 술값을 모았지요.


이렇게 100g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두철미하게 관리하던 몸매는

온갖 아르바이트로 버티다, 드디어 사진 찍는 일을 하게 된

잡지사에 취직하면서 무너집니다. 


한 달에 한번 2박 3일 정도 출장을 가면 산행을 해야 했거든요. 

카메라 가방을 들고 산행을 한 덕분일까요.

80kg였던 몸무게가 57kg까지 빠집니다. 아니 뺐습니다. 

수건으로 허리를 묶으면 몸이 다 가려졌어요. 지금은 묶이지도 않는데. 


물론 노력도 했지요. 

더 이상, 여자인 듯 여자 아닌 여자로 살아가는 게 좀 지루했나 봐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남자 친구가 생기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서른에 결심했습니다. 

머리도 길게 기르고, 살도 빼보자고. 


하루 세끼, 5시 이후 금식을 유지했습니다. 

소개팅도 전투적으로 나갔지요.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연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뼈를 묻고 싶었던 잡지사에

진짜 뼈를 묻게 될까 두려워 일단 그만두고

이직 준비를 하며 살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찔끔찔금, 아직은 괜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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