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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Feb 19. 2022

20대에 붙은 시험은 운전면허 뿐

덕분에 실패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고 믿어본다.   <사진·픽사베이>


고교시절, 

(남편도 애도 없던 그때)

나는 생명공학도를 꿈꿨다.

성적표에서 내 강점이나 약점을 분석하는 대신,

공부를 아주 우직하게 하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인생의 단맛이 여기 있네'라며

그냥 생명공학도를 꿈꾸기만 했다.


공부를 더럽게 못하지도 그렇다고 잘하지도 않던

애매한 포지션(그럼에도 약간은 잘한다고 혼자 믿고 있었다)이 

대외적(?)으로 뽀록 난 건 수능에서였다.


현역에서 애매한 점수를 받아 

원하는 생명공 학도가 될 방도(?)가 없어 재수를 했고,

재수를 해서는 현역일 때보다 100점(원점수가!!!) 이 떨어지는 기염을 토해

부모님을.... 슬프게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온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였다. 

세상에. 

지금 생각하면 그깟 수능이 뭐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었다(그래도 잠은 잤다).

 

하지만 누구보다 상처받은 건 나 자신이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기보다는

그냥 본능적으로 내 인생은 변방에서 끝나겠구나,

메이저로는 살지 못하겠구나 싶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20대를 시작했다.


욱(?)하는 마음으로 생명공학과는 무관한 사진과 비실기를 지원했는데,

붙었다. 엄마는 도살장에 소를 끌고 가듯 80킬로가 넘는 장정을 끌고 가 등록을 했다.

카드론으로 당긴 돈으로.

첫 학기는 부모님의 카드론, 

다음 학기부터는 학자금 대출로 사진과를 졸업했다.

(29살 때 털었다.)


카메라도 없는 딸이 사진과에 갔다고

아버지는 FM2를 사다 주었다.


꾸역꾸역 등 떠밀려 학교에 갔다.

당시 사진과는 독채 건물을 썼는데, 

빨간 벽돌에 여자애들이 그림처럼 달라붙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나는 여자애들이 담배를 태우는 것을 

실시간으로 코앞에서 본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대성통곡을 했다.

'망했다. 양아치들 뿐이네.'


그때는 몰랐다. 

그냥 담배를 피우면(게다가 여자라면) 그냥 다 양아치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서울 외곽의 서민 동네에서 나고 자란 환경 탓인가,

한 번도 우물 밖으로 나간 적도, 나갈 생각도 못한 내 탓인가.


현역에서도 재수를 해서도 실패한 대입.

어찌할 도리 없이,

가고 싶은 곳도,  오라는 곳도 없어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데서나 내리듯

자포자기하듯 골라잡은 사진과.

나는 그곳에서 세상에는 정말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것, 

정말로 다양한 인생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열아홉 아니 스무 살까지 내가 생각하던 인생은

대략 어느 정도의 나이에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다니다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것, 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좋은 학교도 못 간 내 인생은 이미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살아가는 건 옳고 그르다로 따질 수가 없어 보였다.

그런 건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것 말고도

내가 아는 것 말고도

그것 말고도 다양한 인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란.

동기들의 나이차는 30년이었다. 

가장 어린 동기가 19살, 가장 나이 많은 왕고 형님은 50살이었는데

그 나이에 사진을 배우고 싶어 학교에 왔다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수능 400점 만점에 70점 받고 들어온 동기들과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각자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세상과 부딪혀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내 인생이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 인생을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었다.


나는 태양만 빛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폴론이니까.

헌데, 그곳에서 만난 디오니소스들 덕분에

달빛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을 밝히는 것은 그들이었다. 

음주가무의 신들과 어울리며 술을 배웠고,

그들은 나와 함께 나의 20대를 만들어갔다.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어쩔 수 없이 사진과에 던져졌지만,

사진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노출 따위 따지지 않고 감도 4000으로 올려가며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돌아 돌아 만나게 되었을 사진을 일찍 만나 반평생을 함께 해왔다.

사진으로 밥을 먹고(많이는 못 먹었다) 살았다.


사진과를 졸업하고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카페, 아기 사진관 알바를 전전하는 내게 엄마는 

다른 일(?)을 권했다. 

하지만 사진이 아닌 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다시는 카메라를 잡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카메라 장비를 싣고 여기저기 떠돌며 사진 찍고 글을 쓰며 살고 싶었다.

버티고 버티다 겨우 작은 잡지사에 취직했다.

내가 원하던 곳에서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


왕복 4시간, 박봉, 토요일까지 근무.

조건은 따지지도 못했다.

사진 찍는 일로 나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 설레었을 뿐이다.


딱 1년만 버티자고 다짐한 곳에서 5년을 근무했다.

3년차가 되었을 때, 날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러 부조리한 일이 있었다.

하고 싶은 사진을 하기 위해선

하기 싫은 잡다구리 한 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글. 

쪽수가 부족하다고 사진기자인 내게 글도 쓰라고 했다.

데스크는 나를 엄청 갈궜지만

실력 있고 인간적인 분이었다.

덕분에 다음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서른이 되던 해 2월,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갈 곳을 구하고 그만둔 게 아니라, 먼저 그만두었다. 

익숙해졌지만, 이러다 여기에 뼈를 묻을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아직 뜨거웠다.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 다음날 연락이 왔다. 

내가 바라고 또 바라던 좋아 보이는 회사였다. 

주저리주저리 실패뿐인 이십 대를 적어 보냈는데.

드디어 내 인생도 풀리려나?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실패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1시간이 넘는 면접을 보고,

떨어졌다. 

붙은 시험이라곤 운전면허뿐이었다.

그래도 운전면허는 한 번에 붙었다고 웃을 뿐. 

아버지에게 운전면허가 붙었다고, 

처음으로 '합격' 소식을 전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왜, 배추 장사하게?"

쓸데없이 1종 면허를 땄다고 하는 말씀이었다.


첫 회사를 그만두고 

내 인생 최대 스코어인 A사 면접에서 미끄러졌다.

면접 본 곳에서는 아무 연락들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면 어쩌나,

퇴직금을 미루고 미루는 사장님을 뒤로하고

일단 지른 카메라 장비값도 숨을 조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진짜 배추장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는 1종 면허도 있잖아. 포터에 야채라도 실어다 팔면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편안해졌다. 


신기하게도 그날 오후 A사만큼은 아니지만

내게는 황송한(?) 곳에서 일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23일 만에 다음 회사로 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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