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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Dec 23. 2022

1호의 첫 겨울방학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의식의 흐름대로 --- 그 끝에는 뭐가 있나

무수히 많은 방학이 있었다. 내게도.

아르바이트로 뼈빠지게 일하던 대학시절부터

동생과 오징어짬뽕과 해물라면에 밥까지 말아 먹으며 중량에 힘쓰며

틈틈히 친구들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시간 떼우던 청소년 시절,

그리고 개학식 이틀 전쯤부터 방학 내 밀린 일기를 쓰느라 똥줄타던 초딩 시절까지.

(별다를 거 없이 하루하루가 그날이 그날이라 다른건 대충 구라가 가능한데, 날씨를 어찌할 수 가 없었다.)


눈을 떠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시간들.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없던 10대에는 그랬다. 

지루하고 지리한 자유였다.


고교시절 내복같은 나팔바지를 입고 껌좀 씹으셨던 아버지는

(흑백사진으로도 감출 수 없는 선명한 나팔바지 핏) 

평생을 처자식 먹여 살리는데 쓰셨다. 

그래도 한때 잘 풀려 <@@> 라는 회사에서 끗발 좀 날리셨다는데

내 나이 열두살 때 이후로 우리집안(?)에 그런 여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오마니 말씀으로는 그 많던 돈들이 분명 있었는데 써보지도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듯 사라졌다고 하셨다. 

아... 엄마. 평생을 시부모 봉양에 근검절약으로 살아온 오마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여자의 일생은 21세기에도 계속 된다. 



전문적인 기술도, 학력도, 돈도 없던 아빠는

개나리 봇짐하나 들고 온 엄마와 결혼해서 우리를 키웠다는데

그건 생각보다 빡세었던 것 같다. 

가장이 된 아빠는

평생 부침이 있었지만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며

자식들에게 비바람 피할 안전한 집과 먹거리를 제공해주셨다.

다만, 높은 엥겔지수는 피할 수 없었다. 옷가지는 피복 정도로 해결해주셨다.

거기에 아빠의 늙고 병든 부모도 모셨다.


아빠는 5남매의 셋째로 그중 효자였다.

(효자 아빠를 욕한 죄인가. 나는 그보다 더한 효자를 만나 살고 있다. 부모님이 낳아주셨으니 감사해야 한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그의 원가족과 관련된 모든 언쟁을 멈췄다. 이길 수가 없다. 그래 니 똥 칼라파워다.)


나의 친할머니에게는 바람둥이 남편과, 아들 넷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다. 

할머니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스무살까지(가끔 막내 아들에게 가기도 하셨는데 금방 보따리에 짐을 싸서 돌아오시곤 했다.)

오남매들은 아무도 엄마를 찾지 않았다.

그들이 중풍으로 20여년 누워있던 엄마를 찾아온 건 장례식장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며 울던 고모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아들들은 그러지도 않았다. 

그들은 피 한방울 안 섞인 남편의 부모를 평생 모신 엄마(형수이자 제수씨이자 새언니)에게

잘하네 못하네 평가를 하곤 했다.


불안전한 경제사정, 

다정함은 1도 없는 남편,

아픈 시부모님,

지랄맞은 시댁 식구들


엄마는 스물넷, 결혼과 더불어 나와 동생, 그리고 그들도 함께 얻었다.

어떻게 버텼을까?




개학이 닥쳐서야 밀린 일기를 쓰느라 눈물 콧물 흘리던 꼬마 옆에서 

몽둥이를 들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쓰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래저래 벅차고 힘들었던 엄마,

엄마도 방학이 특히 더 빡시었던 게지요? 



요즘 초딩은 일기를 일주일에 한번만 쓰니 다행이다. 

겨울방학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지마라 오지마라, 아무리 도망가도 올 것은 온다. 

겪어야 할 것은 겪어야 한다.


겨울방학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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