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들의 플레이그라운드, 비건 카페&식료품점&커뮤니티 운영자 퀸의 이야기
작년의 어느날, 매일 지나는 골목 경복쌀상회 옆에 작은 비건카페가 생겼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비건 디저트부터 다양한 비건 식료품까지 다양한 것들을 팔고 계셨다. 동네에서 사기 어려워 인터넷 주문을 하면 택배 쓰레기가 많이나오는 것이 걸려서 동네에서 비건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것이 반가웠다. 외국인 분이셨는데 어떻게 연희에서 가게를 하게 되셨는지, 어떤 활동들을 하시는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길게 대화하긴 어려웠다. 어느날 임대가 붙어있어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연희동 큰길에 더 넓은 공간으로 확장이전을 하셨다. 더 본격적으로 비건 식료품점과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셨고 그 시점이 제비의 일상여행을 시작할 때와 맞았다. 여행코스로 방문해도 괜찮을지 여쭤보니 환히 웃으며 마음 내어 주셨고 항상 환대해주셨다.
비건앤비욘드에서는 다양한 커뮤니티 모임과 클래스를 운영하시는데 주로 외국인 비건 분들과 영어로 진행돼서 사장님과 함께 한국어 버전의 모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비건과 제로웨이스트를 위한 마음도 깊으시고 항상 적극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모습에 사장님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손님이 조금 뜸해지는 시간이라는 일요일 저녁, 사장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제비살롱을 열었다. 평소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지만 비건과 제로웨이스트 활동에 관한 가치관, 마음에 담긴 생각들을 이야기하려면 모국어인 영어로 하는 것이 더 자유로울 것 같다 하셔서, 이매진피스의 강물이 순차통역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주었다. 항상 활짝 웃으며 수줍게 말을 건네던 퀸이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간의 모습과는 또다른 에너지의 존재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사람들과 함께 자유로이 펼쳐지는 퀸의 삶이야기를 탐험해보았다.
퀸: 안녕하세요. 저는 비건앤비욘드를 운영하고 있는 퀸이예요. 베트남계 미국인이고 한국에 온지는 10년 정도 되었어요. 한국어로 평소 대화하는 것은 괜찮지만 마음에 담긴 생각이나 가치관을 이야기하려면 영어가 더 좋을 것 같아서, 오늘은 영어로 말해볼게요.
제비: 편하신 언어로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비건 앤 비욘드는 어떤 공간인지 소개부탁드려요.
퀸: 비건앤비욘드는 비건 카페 겸 비건 식료품점, 그리고 비건 커뮤니티 공간이예요. 카페에서 파는 기본 메뉴들은 전부 비건 글루텐프리 제품들이에요. 가게 한 켠엔 일반슈퍼에서 구하기 어려운 비건 식료품이나 식재료들을 판매하고 있죠. 비건들이 여기에 오면 라벨, 성분표를 확인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 없이 맘 편히 먹고 마시는 공간, 장을 볼 수 있는 마켓이죠. 동시에 비건이 아닌 사람들도 함께 와서 비건 문화를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예요. 매주 금요일엔 버려지는 못난이 유기농 채소를 포장없이 정기배송 받아 손님들에게 제로웨이스트로 나누어 드려요. 한켠엔 비건 라이브러리가 있어서 손님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건 관련 책들을 기부해주셔서 여기서 읽거나 빌려가시도록 하고 있어요. 책을 통해 비건의 키워드로 서로 연결되는 거죠. 비건 음식 판매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멕시칸 푸드 팝업 행사를 하기도 했고 비건다큐상영회도 했어요.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사람과 자원을 연결해서 뚝딱 뚝딱 만들어 가는 실험실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제비: 비건앤비욘드 공간 이야기 외에, 퀸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도 부탁드려요.
퀸: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저는 베트남계 미국인이예요. 어느새 한국에 산지 10년이 되었어요. 중간에 3년 정도 미국과 대만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돌아왔으니 산 기간은 총 7년정도 되네요.
처음엔 영어학원 강사로 한국에 오게 되었죠. 처음 영어강사로 배치 받았던 곳이 인천 영흥도에요. 혹시 들어보신 적 있나요? 인천 사람들도 가본적이 거의 없는, 안산 오이도 역에서도 한 시간을 넘게 가야 다다를 수 있는 섬이에요. 그 섬 전체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저 하나였어요. 처음엔 너무 당황했지만 정이 가는 마을이었어요. 첫 계약 기간은 일년이었는데 저는 왠지 그곳이 좋았어요. 이년을 더 있었죠. 그렇게 시작한 한국 살이가 영어학원에서 아이티 기업 마케팅 담당자로 연결되며 생각보다 오래 머물고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었어요. 제대로 한국을 이해하고 싶어 서강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한국어 과정을 다 마치기도 했죠.
저는 북촌의 한옥이나 한복같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한국어를 할 줄 알게 되고 실제로 살기 시작하니까 북촌이나 강남, 한복과 한옥으로는 다 드러나지 않던 한국의 다른 면들을 마주하게 됐어요. 제 서툰 한국어를 듣고 한국 사람들은 자주 이런 질문들을 했어요. ”아, 베트남에서 시집 왔어요? 한국말 잘하네“ 그때마다 베트남계 미국인이라고 ”아뇨 미국에서 왔어요“하고 다시 소개를 했어요. 그럼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요 “아니 얼굴이 분명 아시아 사람인데 무슨 미국사람이야?” 7년쯤 되던 어느 날, 처음엔 좋기만 하던 한국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힘들어지는 순간이 찾아왔어요. 버스에서 누군가 갑자기 제 얼굴에 기침을 하고는 사과도 한마디 없이 휙 가버리는 거에요. 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여러 번 겪었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더 이상 그 무례함을 참기가 어려웠어요.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 이 나라에 더는 못 있겠다“ 생각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제비: 미국인이라는 소개에 돌아온 그 수많은 질문들, 무례한 물음들이 너무 헤아려져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한국에 지쳐서 미국으로 떠났는데 다시 돌아오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퀸: 미국으로 돌아가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어요. 학업도 마치고 정부기관에 취업해 의료보험도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을 구했어요. 근데 이상하게 자꾸만 회사에 가면 시계만 보게 되는 거예요. ‘아 언제 끝나나, 왜 5시가 안되나? 언제 집에 가나?“ 그 물음들은 결국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졌어요. ‘이 일이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일까? 나는 이곳에 속한 사람인가? 이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인가?’ 그곳에 내 삶이 깃들지를 못한거죠. 어느 날 문득 답이 분명해졌어요. 그날 바로 그만두고 다시 불안정한 삶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인터넷 쇼핑몰부터 파트타임까지 안 해본 일이 없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도쿄에서 한 달간 펫시터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돌아가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일본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시 왔어요. 지쳐서 떠났었는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나를 충만하게 채웠던 따스함과 소속감, 그런 정들이 미국에 있는 내내 그리웠던 것 같아요.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가방을 꾸려 한국에 왔어요. 그렇게 몇곳을 경유하고 또 환승하며 돌고 돌아 여기 연희동으로 오게 됐네요.
제비: 한국에 돌아와서 비건카페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퀸: 비건 카페를 시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어요. 돌아와서 다시 일하기 시작한 영어학원이 코로나로 휴강을 하고 시간이 많아졌어요. 미국에서부터 취미였던 베이킹을 시작했는데 한국에서는 베이킹용 버터를 구하기도 어렵고 너무 비쌌어요. 그래서 버터 없이 할 수 있는 베이킹을 찾다가 비건 베이킹을 알게 되었어요. 첫 비건 베이킹은 바나나브레드예요. 오늘 여러분이 드시고 있는 빵이에요. 만든 빵을 학원에 가져가 동료나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은 거에요. 다시 먹고 싶다, 구매할 수 없느냐 요청이 이어졌구요. Why not? 결국 코로나로 학원을 그만두게 되면서 제가 좋아하던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어디엔가 나처럼 관심은 있지만 비건 재료 구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해 비건 베이커리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비: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어도 타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창업을 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퀸: 미국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인생이 너에게 레몬을 준다면, 너는 레몬에이드를 만들면 된다” 저도 창업 직후에 인생이 준 시고 떫은 레몬 맛을 보게 됐어요. 처음엔 매장없이 집에서 바나나 빵을 구워서 온라인 판매를 했어요. 입소문으로 제법 인기도 있고 매출도 상승했죠. 그러던 어느 날 구매자 중 한분이 제품과 영수증 사진까지 찍어서 위생과에 고발을 한 거에요. 집에서 제조해서 판매하는 것은 허가를 안 받으면 식품위생법에 걸린다는 법규를 몰랐던 거죠. 벼락같이 경찰, 검찰 조사를 다 받게 되었어요. “벌금을 내거나 감옥을 갈래? 아니면 정식으로 허가받고 매장을 내서 법대로 장사를 할래?” 두 가지 선택 밖에 남지 않았어요. 전 물론 후자를 택했죠.
제비: 외국인이라서 창업하는 과정이 더 어려웠을 것 같아요.
퀸: 당연하죠. 외국인이라 대출도 안 되고 막막했어요. 근데도 가능했던 건 연희동에 제가 가던 단골가게 사장님들 덕분이었어요. 가게는 어떻게 준비하는 거다, 보증금이나 월세는 얼마 정도에 시작해야 한다. 연희동 단골 가게 사장님들이 싼 가게도 알아봐서 연결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불과 2주만에 가게를 오픈하게 됐어요. 그게 경복쌀상회와 히메지카레 옆 첫 번째 매장이었어요. 미국통장에 있는 잔액까지 다 털어서 보증금내고, 모험하듯 시작하게 됐어요. 그게 저의 첫 레몬에이드에요. 기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판매까지 시작했으니 삶의 숙제를 제법 잘 푼 셈이죠. 돌아보면 그 일도 다 인연이었겠단 생각이 들어요.
제비: 코로나로 어려운 시절인데 이렇게 넓은 공간으로 확장한 이유가 있나요?
퀸: 저는 사람들이 비건이 되지 않는 이유는 비거니즘의 중요성과 가치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비건앤비욘드가 비건 옵션을 선택하는 일이 쉽고 즐거운 선택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어요. 그러기엔 이전 가게는 너무 좁았어요. 비건이 편안하게 오는 것과 동시에 공간이 편하고 새로운 자극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들도 우연히 왔다가 접촉과 자각이 일어나길 바랐어요. 사람이 한번 눈뜨기가 어렵지 뜨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잖아요. .
제비: 비건앤 비욘드는 이름처럼 단순히 비건 베이커리를 넘어서는 활동들과 의미를 담고 계신 것 같아요. 여기서 펼쳐지는 여러 활동이나 기획들, ‘비욘드’에 담고자 하셨던 이야기들도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요.
퀸: 비건앤 비욘드는 이름 그대로 비건에서 출발해 ‘그 이상’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커뮤니티 기반의 문화공간이예요. 사람들에게 ’비건 플레이그라운드‘라고 설명하기도 해요. 커뮤니티 게시판을 보시면 비폭력 평화대화모임부터 비건 친구를 만나 대화하는 1:1 비건 meetup, 유기농 막걸리 만들기 워크숍 등 취향과 가치에 따라 댜앙한 모임들이 펼쳐지고 있어요. 얼마전에는 씨스피라시, 카우 스피라시 같은 비건 다큐를 함께 보기도 했는데 그 영화상영회에 참여했던 한 분이 페스코에서 비건으로 넘어서는 결정을 하는 일도 있었죠. 연희동에 외국인, 작가, 예술가들이 많은데 그분들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벽면을 공유하고 있어요. 물론 판매도 하고요. 작품이 팔리면 그 수익중 일부를 기부해서 우리가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함께 펼쳐가기도 하죠. 이곳을 통해서 비건 그 이상으로 서로가 서로의 삶에, 가치와 또 다른 가치가 연결되는 연결자가 되길 바라요.
제비: 앞으로 또 소망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퀸: 지금은 코로나로 고립되고 단절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작은 접촉과 잦은 연결이예요. 비건이라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지구의 생명력을 지키는 것이에요. 그런 진정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곳이 그들이 연결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이 넓은 공간이 사람으로 채워지고 새로운 연결과 생성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제 비전과 방향에 열정을 더해갈 거에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그 일이 다 일어나지 않는건 어쩌면 결국 열정을 쏟아붇지 않기 때문아닐까요? 맞는 방향이라면, 돕는 사람들이 있다면 삶의 열정을 다해서 그 방향으로 가야죠. 여기서 그런 사람들을 더욱 다양하게 만나고 연결해주는 로컬 커넥터가 되고 싶어요.
제비: 앞으로도 한국에서 정주해 살아가실 계획이신가요?
퀸: 가끔씩 사람들이 집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어봐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여기가 제 집인예요” 집에 도착한 사람은 더 이상 떠날 필요가 없죠. 이전에 살았던 미국 조지아는 그곳이 어디든 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연희동은 조금만 걸어가도 닿는 거리에 다양한 공간과 문화, 환대해주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동네의 느낌이 좋았어요. 사람이 일을 하며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도 중요할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떤 관계의 크기와 깊이 속에서 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곳이 연희동이어서, 서로가 서로를 쉽게 만나고 대화하고 돌보는 동네의 관계가 살아있는 곳이어서 이런 삶의 결정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든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찾는 것도, 뿌리내리고 머물고 싶은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죠. 하지만 직접 부딪히고 시도해보지 않으면 무엇이 내 일인지 깨닫는 있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는 것 같아요. 여러분도 자기만의 길과 삶의 가치를 찾는 여정에 그렇게 삶을 쏟아붓는 모험들을 선택해 가기를 바라요.
문 닫을 시간이 훌쩍 넘어가도록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어떤 주제, 어떤 질문을 던지든 매번 한편의 소설같은 이야기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한정된 페이지에 다 담지 못했지만 새로운 질문을 던지면 새로운 장이 시작됐고 그때마다 사연은 굽이굽이 이어졌다. 우리는 퀸의 여정을 따라서 그녀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한복을 입고 ‘인연’, ‘풍수’같은 단어들을 능숙하게 쓰며 한국과의 연결감, 영혼이 속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는 퀸의 삶이야기를 그야말로 탐험했다.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잠시 마주쳐 인사를 건넬 때는 상상할 수 조차 없던 이야기들, 언어의 제약 없이 자유로이 이야기를 펼치는 에너지가 새롭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수줍게 인사를 건네던 사장님은 ‘퀸’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다시금 만났다. 퀸은 자기 삶의 질문을 좇아 낯선 대륙을 횡단하고 다양한 언어를 익히며 5개국을 여행한 여행자였다. 또 자기 삶의 나침판이 가르키는 떨림을 좇아 경계를 넘고 낯선 곳에 뿌리내린 탐험가였다. 낯선 땅의 문화와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구를 생각하는 일상을 열어가는 연결자이기도 하다. 제비살롱을 통해 퀸의 이야기를 깊이 듣고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이야기들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퀸의 존재를 마주하게 됐음에 기뻐서, 서로의 삶을 나누며 우리가 함께 연희동에서 열어갈 새로운 일들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일구어갈 새로운 연결들이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