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의 택시 안에서

세비야에 도착한 순간, 이 도시의 지난 추억을 떠올리다.

by cucu

마드리드에서의 일주일 살기를 끝내고 렌페라고 불리는 스페인의 고속열차를 타고 세비야로 향했다. 세비야를 스페인 한 달 살기 일정에서 10일이나 넣은 이유는 아쉬워서였다. 3년 전 독일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스페인 여행을 했었다. 그때 삼일 정도 세비야에 머물렀었다. 세비야만이 가지고 있는 도시의 분위기는 딱 내가 생각했던 스페인의 모습이었다. 그런 도시에 삼일밖에 머물지 못한 아쉬움을 이번 스페인 여행을 통해 풀고 싶었다.

세비야 산타후스타 역

렌페가 드디어 세비야 산타 후 스타 역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끌고 역사를 빠져나와 잠깐 고민을 했었다. 숙소까지 걸어갈까 아니면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만약에 내 손에 그 큰 캐리어만 없었어도 나는 주저 없이 걸어가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걸어가면서 오랜만에 마주하는 세비야라는 도시와 인사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손에는 20Kg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그 캐리어를 끌고 걸어서 숙소까지 갔다가 반도 못 가서 세비야고 뭐고 길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택시였다. 길진 않지만 그래도 줄이 어느 정도 있는 택시 줄에 서서 나의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렸고 이윽고, 캐리어는 트렁크에 넣고 나는 택시의 뒷좌석에 쏙 들어갈 수 있었다.

택시가 부드럽게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숙소인 호스텔까지는 차로 10~15분 거리였다. 혹시나 택시 아저씨가 돌아갈까 봐 구글 지도로 숙소까지 가는 경로를 검색해 보았다. 걸어서 가는 것은 역에서 쭈욱 직선 선로였지만, 차로 가는 경로는 강변을 끼고 돌아서 가는 경로였다. 아무래도 세비야 시내는 좁다란 골목이 많아서 차가 다니기 힘들다 보니, 강변의 큰길 따라서 가는 경로를 안내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글맵으로 폰 화면을 가득 채우고 나의 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쩜 이 도시는 3년 전과 변한 것 없이 한결같았다. 한국은 몇 개월 사이로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고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기 바쁜데, 세비야는 햇살과 건물, 길의 가로수까지 나의 3년 전 기억과 그대로인 거 같아 반갑고, 고향에 돌아온 기분도 들었다.

일주일 내내 우중충한 날씨였던 마드리드에 있다가 세비야로 넘어오니 미세먼지 한 톨 비치치 않는 햇빛이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그랬다. 그 햇빛이 너무나 그리웠다. 창밖에는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오렌지 나무들이 줄 맞춰 서 있었다. 처음에 가로수가 오렌지 나무인 게 너무 신기해서 여기 사람들은 길가다가 목마르거나 배고프면 오렌지 따 먹으면 되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추후에 세비야 시내투어 하면서 가이드에게 듣기로는 오렌지 나무는 이슬람 문화의 잔재인데, 가톨릭이 세비야를 점령했을 때 밀어버리려다가 놔두었다고 한다. 아마 가톨릭 지배자들도 달콤 쌉싸름한 오렌지맛과 향의 매력에 쏙 빠져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너무나 그리웠던 햇살과 오렌지 나무와 브라운 계열과 흰색 계열이 섞여 있는 건물들이 눈 앞에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3년 전 이 도시를 함께 여행했던 언니가 떠올랐다. 독일 워홀 생활 때 직장 동료이자, 짧게나마 룸메이트였던 언니. 나처럼 여행을 좋아하고 이야기도 잘 통해서 잘 붙어다녔드랬다. 그리고 이역만리 가족 하나 없는 외국생활에서 우리는 서로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도 언니에게 많이 의지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언니에게 철없던 행동들도 많이 했지만, 언니는 철없는 동생이 그런 거겠거니 하면서 잘 이해해 주고 넘어갔던 것 같다. 지금 이 도시에 언니도 같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이 길거리 마켓을 구경하고 사진 찍고 찍히는 걸 엄청 좋아하던 언니 덕택에 나도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댔던 추억이 떠올랐다. 마음속으로는 '언니, 제발 그만...' 하면서도 내 손은 어느새 언니를 피사체로 스마트폰 사진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언니는 잘 살고 있을까. 사는 게 바빠서 연락한지도 오래되었다. 세비야에 있을 동안 언니에게 연락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고 다시 창 밖의 풍경들에 눈을 고정했다.

시원한 강변도로를 달리다가 택시는 어느새 좁은 골목이 구 불 구분한 시내에 진입했다. 언니랑 3년 전에 세비야에 도착해서 체크인했던 숙소가 생각났다. 그 숙소도 이 구불구불한 골목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범한 외관의 숙소였는데, 직원은 가냘픈 몸의 여자 한 분이 계셨다. 체크인을 하고 우리의 방인 3층으로 향하려고 했는데... 그 숙소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유럽의 오래된 숙소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의 숙소가 그럴 줄을 전혀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언니가 그럼 짐을 어떻게 3층으로 옮기냐고 물어보자 그 가냘픈 직원분이 본인이 도와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 짐을 함께 들면서 순간 직원분의 눈의 동공 지진을 잊지 못하겠다. 그래도 본인이 한 말이 있어서 열심히 같이 짐을 옮겨주시기는 했다. 나 혼자 들기에도 버거운 짐은 여자 둘이 들기에도 어지간히 버거웠다. 지나가던 다른 방 신사 손님이 보시더니 우리 짐을 번쩍 들어서 방 앞에 옮겨주셨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이것이 바로 신사의 매너구나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에 택시는 어느새 숙소 앞에 도착했다. 워낙 구불구불 좁은 골목이 많아서 주소를 알려줘도 기사님이 잘 찾아가실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세비야의 택시기사를 내가 너무 우습게 본 것이 아닌가 싶다. 기사님은 정확히 숙소 앞에 나를 데려다주셨다.

그리고 나는 몇 년 후 다시 세비야를 찾아왔을 때 떠올릴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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