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1년간의 저녁 식탁 차리기
지금의 저질 체력과 달리 엄청난 지구력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20대 초반이라면 돌도 씹어 먹을 정도로 체력이 좋은 게 보통이지만 나는 그때 인천과 서울, 양평을 일주일 동안 오가며 나 자신과 엄마, 아빠 셋을 챙기는 강철 체력의 어린 간병인이었다.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엄마는 서울의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동생마저 학교 수업으로 집을 떠나자 양평 우리 집엔 아빠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당시 나의 일주일 루틴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인천 자취방에서 평일을 보내고, 금요일 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바로 서울행 버스를 탔다. 며칠 못 봤다고 반가워하는 엄마에게 일주일 동안의 에피소드를 풀어내면 금세 하루가 갔다. 토요일이 되면 양평으로 가서 엉망이 된 일주일치 살림살이를 했다. 처음 밥을 하기 시작한 게 그때였다. 서투른 솜씨였지만 혼자 있는 아빠가 안쓰러워서 나름 정성을 쏟은 밥을 차려냈다. 미역국 같은 난이도 下 레벨로 시작해서 어느 날엔가 자신감이 붙었는지 소고기 뭇국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경험했던 첫 무 손질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엉망인 칼 솜씨 때문에 칼질을 마치기도 전에 손마디가, 허리가 저려온다.
지금도 별로 나아지지 않아 아직도 무 손질 때문에 뭇국 끓이기가 꺼려진다.
그래도 고통이 더해진 음식엔 깊은 맛이 난다. 부산 출신인 아빠 입맛에 맞춰 고춧가루를 넣은 부산식 빨간 뭇국은 시원 칼칼한 독특한 맛이 있다. 내 고통 한 방울 더한 깊고 독특한 그 국물 맛은 술 마신 다음날 가끔 생각이 나곤 한다.
당신과 나의 네 번째 이별식탁
오늘의 소고기 뭇국에는 고춧가루가 없다. 의도된 것은 아니고 넋 놓고 있다가 잊었다. 아무래도 무 손질로 피곤했던 모양이다. 어쩜, 이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면모인가.
부대찌개나 소시지 야채볶음을 생각하다가 탄생한 오늘의 어나더 메인디쉬 부대볶음. 부대찌개에 들어가는 양념에 각종 소시지와 양파, 사리면을 볶으면 된다. 제육볶음처럼 살짝 달짝지근해야 젓가락이 계속 가게 된다. 단순히 매운맛으로만 상에 오르기엔 재료들이 좀 약한 부분이 있으니께.
무 써는 게 어렵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느끼는 난이도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다는 뜻이겠지.
남들에게 쉬운 것이 나에겐 어렵다는 사실만큼 자괴감 느껴지는 것도 없다.
무 썰기 말고도 이런 것들은 많다. 적은 월급으로 야무지게 인간도리를 다 하는 것이 그랬고, 부지런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것 또한 그랬다.
엄마가 만들어 준 커다랗고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편하게만 자랐던 나는 똑똑하게 돈 쓰는 법을 몰랐다.
필요한 것을 위한 대가라는 개념을 배운 경험도 없었다. 내가 느끼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욕구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손에 쥘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미래를 위한 치열함도 필요 없었다. 원하는 미래가 뿅 눈 앞에 펼쳐질 줄 알았던 것 같다.
"현실을 좀 직시해. 너는 가만 보면 꿈속에 사는 애 같아."
사업 확장을 감행하는 내게 아빠가 말했다.
당시에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아픈 말을 하는 아빠가 참 섭섭하게 느껴졌다. 꼭 찌르듯이 말해야 했을까.
뒤늦게나마 현실을 살기 위해 이 이상주의자는 서걱서걱 불필요한 망상들을 잘라내고 있다.
못났지만 누가 봐도 뭇국 속 무인 것처럼, 정제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밥 벌어먹고사는 어른이 돼가는 중이다.
그게 쉽지는 않아서 손마디가, 허리가 저려 올 때가 있다. 다 내려놓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럴 수 없다. 난데없이 끓이던 국을 쏟아버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언젠가는 나도 깊은 맛이 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만이 낼 수 있는 맛으로 사람들 마음에 가 닿는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술 마신 다음 날처럼 삶이 어지럽고 속이 쓰릴 때 생각나는 그런 글을 짓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시원하네."
하얀 국그릇에 담긴 맑은 뭇국이 오늘도 깨끗하게 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