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이별 식탁 : 찜닭과 카라멜 마끼아또

독립을 앞둔 달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by 신보라
오늘의 저녁 식사


초등학교 4학년, 스팸을 처음 먹었다.

세상에 이런 맛도 있구나, 새로운 맛의 지평이 열린 열한 살의 기억이 있다.

엄마에게 스팸을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자식들을 최대한 건강식으로만 먹이려던 자신의 노력이었다고 자랑했다.

대학교 1학년, 한 마리 찜닭 요리를 처음 먹었다. 학교 급식에서 먹던 비실한 살코기가 아닌, 달짝지근하고 실한 닭고기 살, 끊임없이 먹을 수 있는 탱탱한 당면이 준 찜닭 요리는 충격이었다. 자, 이제 찜닭을 늦게 시작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안타깝게도 대답을 들을 기회는 놓쳤지만, 괜찮다. 내가 스무 살이 됐을 무렵, 안동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줄 알았던 찜닭 요리는 전문 프랜차이즈가 생기며 대학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찜닭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보다 더 쉽게 밀키트라는 것이 우리 부엌에 들어와 그야말로 뚝. 딱. 30분이면 찜닭을 완성하는 세상이 되었다.



(왼쪽부터) 오늘의 메뉴 항공샷, 감자알 당근알 닭고기와 당면 어느 하나 존재감 없는 것 없는 맛좋은 찜닭, 그리고 오늘도 징그러운 숙주 국



당신과 나의 아홉 번째 이별 식탁


찜닭


찜닭 재료 : 닭 한 마리 (닭볶음탕용), 감자, 당근, 양파, 당면, 소주 혹은 미림, 대파, 기호에 따라 고추, 참깨

양념장 : 간장 반 컵, 굴소스 1스푼, 설탕 3큰술, 다진 마늘 2큰술, 물엿 3스푼, 후추 약간


당면을 물에 불린다.

채소를 손질하자. 나처럼 안 예쁘게 손질돼도 OK

닭을 씻고, 소주 혹은 미림을 약간 넣어 비린내를 제거한다.

닭을 2-3분 간 끓인다. 불순물이 떠오르면 버리자.

닭을 씻고 잠길 정도의 물에 넣어서 양념장과 함께 끓인다. 약간 매콤한 맛을 원하면 고추기름을 둘러서 끓여도 좋다. (물 대신 쌀뜨물도 좋다!)

30분 정도 끓여 주면서 중간중간에 감자, 당근, 양파, 대파, 당면 순서로 넣는다. 당면을 넣은 후엔 자주 저어주어야 한다.

5분에서 10분 정도 더 끓여 주면 완-성!

하림 씨의 밀키트도 꽤 괜찮으니, 위 방법이 귀찮으면 마트로 가자.



촵촵촵촵. 거부할 수 없는 찜닭의 매력에 성식 씨도 빠져버렸다. 맛이 참 기특하다.

적당히 익은 닭고기의 결이 부드럽고, 스민 달큰한 양념이 착착 감긴다. 감자 너는 참 특별하구나.

고기 옆에서도 이리 좋은 맛을 내다니. 당면은 더 넣을 걸, 아쉬워서 젓가락만 휘젓다가 작은 살코기를 발견하면 그거대로 기분이 좋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기분도 잠시, 아빠는 맛있는 식사 후 조리대에 그릇을 놓고 간다. 그의 무심한 뒷모습이 좀 밉다.

무수한 닭뼈가 그릇 안에 그대로 있는 것은 고사하고, 조리대 바로 옆이 설거지 통인데 10CM도 더 움직이고 싶지 않은 그의 의지를 보니 내 가슴엔 짜증이 낮게 깔렸다. 이것은 결코 화로 표현될 일 없는 무기력한 분노.

한 번은 설거지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서 울기까지 했는데, 그 눈물을 보고도 잘못은 더러워진 그릇에 있다고 여기는 그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30년 동안 집에서 찜닭을 먹어본 적 없는 가여운 사람이니 뜨거운 말들을 다 삼켜버렸다. 맛을 알면서 먹지 못하는 고통은 괴로운 것인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30년의 가련한 시간.

메마른 마음에 '긍휼'이란 단어를 아로새기며 거센 콧바람을 내쉰다.





이제는 아득해진 기억 속에서 아빠와 나와 엄마는 강남역 카페에 있다. 엄마랑 아빠는 젊은이들 틈에 앉아 있고 나는 카운터로 가서 커피 주문을 한다. 엄마, 아빠는 어른이니까 어른의 커피,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나는 카라멜 마끼아또. 먼저 나온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호호 불어가며 호록, 호록, 짧은 호흡으로 음미하는 아빠. 얼마 안돼 내 카라멜 마끼아또가 나온다. 구름처럼 뭉개 뭉개 올려진 하얀 휘핑크림에 시선을 뺏긴 아빠가 말한다.


"왜 너만 맛있는 거 먹냐"


"어? 이.. 이거 맛있어 보여?"


두 사람의 취향을 묻지도 않고 고른 내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말까지 더듬은 나는, 그의 아메리카노와 내 카라멜 마끼아또를 바꿔 준다. 바꾼 커피를 한 입 길게 쭉 마시는 아빠. 그의 입에는 크림과 함께, 바꿔 마신 커피에 대한 만족스러움이 꾸덕하게 묻었다.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카페 풍경을 낯설게 보던 눈짓, 카라멜 마끼아또를 나눠 마시며 흡족해하던 입 모양.

두 시골 사람의 얼굴에서, 프랜차이즈 찜닭 집에 처음 간 내 얼굴이 겹쳐진다.

'긍휼'을 아로새기다가 옛 기억에 잠긴 나는, 평범함을 뒤늦게 경험한 얼굴들에 괜히 마음이 잔약해진다.


요리와 식사, 그리고 설거지는 마음을 세웠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수련의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의 수련은 끝.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이 시점에 내 문장도 끝맺기로 한다. 작은 미움과 분노 이 곳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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