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작가다] 나의 실패, 나의 두려움 - 장래희망 실패에 대하여
서른둘에도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삼십대가 되면 대리석이 깔린 널찍한 집에 혼자 살며 멋진 차를 몰고 다니는 더 멋진 어른 여자가 돼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20대 때 신나게 몰고 다니던 나의 작고 귀여운 차를 팔아버린 가난한 뚜벅이’, ‘경제 위기에 몰려 20평짜리 투룸 집을 정리하고 아빠 집에 얹혀살게 된 돌아온 탕자.’
한마디로, 나는 장래희망에 실패한 삼십대가 된 것이다.
얼마 전, 해고를 당했다. 늘 꿈꾸던 직종으로 힘들게 이직 후, 설레는 마음으로 다녔던 2주 만에 생긴 일이다. 입사했을 땐 이미 전임자가 퇴직한 뒤였다. 인수인계 문서 같은 것도 없이 팀원들에게 물어, 물어 업무를 해나갔다. 아직도 꿈꾸는 자의 순진함이 있던 나는 그런 상황이 불만스럽지 않았다. 그저 글 쓰는 일을 한다는 것이 좋았고, 에디터라는 타이틀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으며, 어서 업무를 완벽하게 숙지해서 도움이 되는 직원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 일은 의욕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인수인계 없이 바쁘게 굴러가는 상황과 최종 결재권 자의 부재라는 환장의 콜래보레이션은 업무 사고를 불러냈다. 운명과도 같은 인과관계였다. 회사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여겼던 나는, 중요 문서를 검토 없이 프리패스 시키는 유령부장 (그래 신 부장 너)과 함께 책임을 지게 되리라 생각했다. 금요일 퇴근 10분 전까지 이 심란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금요일 퇴근 10분 전, 회의실로 불려 가 해고통보를 받았다.
“저 지금 잘리는 거예요?”
“아니요 대리님. 우리 그런 표현보다는 서로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합시다.”
떨리는 손으로 클라이언트에게 보낼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하고 짐을 챙겼다. 해고통보를 한 유 부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책임을 져야 할 신 부장은 프라이머리의 ‘씨스루’를 부르며 금요일 퇴근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랜 인연을 지켜주는 저들의 의리에 현기증이 났다. 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의 송다희가 회사를 나오며 울던 장면에 내가 겹쳐졌다. 다행히 다희와 달리 울지도, 소주를 마시지도 않았다. 그저, 몇 년 전 준비되지 않은 채로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았던 그 때 그 마음과 너무도 닮은 이 마음을 곱씹었고, 황망함과 억울함에 유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하지만은 않겠다며 분풀이를 했을 뿐이다.
아는 언니들이 20대 때 겪었던 부당해고 이야기를 해줬을 때, 안쓰러운 얼굴을 하던 내가 떠올라 화가 나고 창피했다. 바보같이. 곧 자기 일이 될 줄도 모르고 타인 이야기에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을까. 딱 남 이야기 듣는 그런 표정을.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낯설었던 이야기들이 모두의 이야기에서 곧 내 이야기가 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32년이란 세월동안 사람들이 말하는 키워드에 해당하는 웬만한 사건, 사고는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아직도 나는 그 과정에 있다.
아직 지혜가 부족한 나는, 이 과정을 풀어나갈 현명함보단 두려움에 몇 날 며칠을 출근하는 척을 했다. IMF시절 아버지들처럼.
한스밴드의 ‘오락실’ 가사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그래도 어른이었나보다. 나는 10대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빠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때처럼 변함없이 침대에 누워 똑같은 소리로 흐느껴 울다 그 소리를 듣고 방으로 찾아 온 아빠에게 모든 것을 들켜버린 것이다. 받아드려지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으로 보낸 일주일이 무색한 반응이었다.
“회사는 또 구하면 돼. 뭐가 걱정이니. 그것보단 쉬는 동안 용돈이 좀 필요하겠네.”
몇 번의 이직동안 한 번도 쉼이 없던 나에게 미소를 선물해 준 한 마디였다. 일주일 넘게 좌절과 두려움에 힘들었던 것에 비하면 한 없이 가벼운 단순함이었다.
사실 나는 다시 희망을 갖기가 무서웠다. 그렇게도 많이 좌절해놓고 다시 희망 따위를 갖는 내가 지겹기까지 했다. 그런데 참, 이토록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나를 확인하고 나니 실패와 두려움의 족쇄를 풀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단순하고 가벼운 인간에겐 그런 것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조심스럽지만 다시 한 번, 내 시간과 열심을 내어 줄 회사 찾기에 희망을 가져보려 한다. 비록 꿈꿔왔던 어른의 모습이 아닌, 아직도 18살처럼 훌쩍이고 용돈 소리에 미소 짓는 덜 자란 사람이지만 이 가벼운 이의 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