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친가도 외가도 큰 댁이 아닌 우리 집은 추석이면 집 밥을 차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일가친척 모두가 여행을 떠났고, 양수리 집에 남게 된 성식 씨와 나.
조카 휘인이도 없는 집이 적막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데, 추석 기분을 조금이라도 내기 위해선 잔칫상이 빠질 수 없었다. 마침 믿고 구입하는 반찬가게에서 명절 음식 예약 공지가 올라왔다.
어맛, 바쁜 현대인들을 위한 너무나 좋은 서비스를 놓칠 수 없다.
당신과 나의 스물다섯 번째 이별 식탁
실물을 다 담지 못한 돼지갈비찜
산적이 먹기엔 너무 고운 산적꼬치, 고기가 실한 동그랑땡, 성식 씨가 좋아하는 동태전, 오징어튀김, 깻잎 전
잡쳐버린 기분은 잡채로!
소고기가 안 보이는 소고기 뭇국
버스로 30분 거리를 찾아가서, 4kg 가까이 되는 음식을 들고 오는 길이 수고스러웠지만 조리를 해보니 역시 탁월한 사장님 솜씨에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게 된다. 어제저녁 메뉴였던 스팸 깻잎 전을 오늘 점심 늦게 먹은 아빠는 이 수고와 감동이 섞인 추석 잔칫상 앞에 저녁 9시나 되어서야 앉았다. 배가 곯은 내가 이미 한 상 해치운 덕분에 1인 밥상으로 차려진 잔칫상.
잔칫상을 다 받기에는 9시라는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아빠는 기름기가 많고 헤비한 돼지갈비찜과 전은 많이 남겼다. 아쉬웠다. 더 일찍 먹어서 많이 맛을 보았더라면 남김없이 먹었을 텐데. 잡채와 소고기 뭇국만이 자취를 감추고 빈 그릇이 싱크대에 들어 가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내일도 추석 연휴니까, 잔치는 계속된다. :)
둘만 남은 추석에는 한 끼의 잔칫상만 차려졌다. 외가에서 명절을 보낼 때는 삼시 세끼 잔칫상에, 중간중간 풍성한 간식 시간까지 빼곡히 먹는 것으로만 하루 시간표가 채워졌다. 떠들썩하고 배불렀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추석이 어색하지만, 힘이 덜 들고, 배도 덜 부른 이 평화가 나쁘지 않다.
한 동네인 외갓집에서 주로 명절을 보내던 과거, 늘 먼저 '집에 가자'라고 하던 아빠의 3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어색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다소 낯선 평화 속, 긴장 없이 늘어지는 행복을 누리며 문득 생각했다. 그때 아빠는 연휴만이라도, 의식하는 것 없이 속 편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나이를 조금 더 먹고 안식의 의미가 간절해지면서 절대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의 실마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오늘 참 편했다. 근황에 대한 평가와 간섭이 없는 속 편한 연휴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