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격정적으로 생일 주간을 보내고, 이제는 쇠약한 30대가 된 나는 결국 지쳐 쓰러졌다.
퇴근 후, '오늘은 스팸 깻잎전을 해야지'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이미 머릿속으로는 장까지 보는 뇌내 망상을 하다가 잠들어 버린 것이다. 램수면상태에서 상상 요리대전을 펼치다가, 쌔한 기분에 잠이 깼다.
눈도 다 뜨지 못하고 거실로 나가자, 아빠는 퇴근 후 샤워 중이었다. 오 마이 갓, 시간이 없다. 급하게 냉장고를 열어 보니, 아까 장을 보는 망상을 한 것에는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싶다. 냉장고엔 선물로 받아 온 치즈케이크와 계란 두 알, 양파만이 날 향해 찡긋 윙크를 한다. 안 그래도 파티하느라 요 근래 저녁 식사에 소홀했던지라, 오늘까지 저녁 식사를 망친다면 아빠는 단단히 삐져버리고 말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다급하게 찬장을 뒤져보니 추석 선물로 들어온 레토르트 설렁탕이 있다. 아아, 감사합니다. 이럴 때 쓰라고 추석 선물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아이쿠 이렇게 귀한 집에 이런 누추한 선물이라니~! 라며 받았던 과거는 안녕 ^^
오늘만큼은 추석 선물 예찬론자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한 가지가 해결되자,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밥이 한 공기가 채 되지 않는 것이다. 별 수 없었다. 오늘은 디저트가 꼭 필요했다.
당신과 나의 스물세 번째 이별 식탁
오늘의 사진 도슨트
언제 어디서나 가장 무난하게 사랑받는 치즈케이크와 요거트
그리고, 내가 먹은 생일상 1. 우니크림파스타와 단호박 관자 리조또_스케줄 청담
내가 먹은 생일상 2. 아이스크림과 팬케이크_버터 핑거
내가 먹은 생일상 3. 블루베리 막걸리_베러 댄 비프
내가 먹은 생일상 4. 로제 파스타_베러 댄 비프
내가 먹은 생일상 5. 새우오일 파스타_베러 댄 비프
내가 먹은 생일상 6. 트러플 리조또_배러 댄 비프
내가 먹은 생일상 7. 순두부 그라탕_배러 댄 비프
이 많은 것들을 다 해치우느라 나는 그렇게 지쳐버린 것이다. 혼자서만 포식하러 다니고, 아빠에겐 밥 한 공기 온전히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디저트를 준비했다.
밤 11시, 케이크를 즐기기엔 매우 늦은 시간이었지만 괜찮다. 아빠는, 내가 아는 60대 중 가장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케이크에 한해서는 어떤 종류의 홀 케이크도 하루 만에 박스만 남게 하는 기막힌 재주가 있다. 투썸플레이스의 딸기 초콜릿 케이크, 파리바게뜨의 생크림 케이크, 뚜레쥬르의 치즈케이크, 몽슈슈의 도지마롤 어떤 것도 상관없다. 올케와 동생이 대학생이었던 시절, 동생의 생일날 올케가 직접 만든 대형 사이즈의 케이크를 선물한 적이 있다. 크나 큰 케이크 상자를 집에 두고 나갈 때만 해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케이크를 맛보고 싶다면 그 자리에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은 없다는 이야기다. 나중이 있다면, 아빠가 오기 전, 그때뿐이다.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동생은 텅 빈 케이크 상자만 뒤졌다. 그 큰 케이크가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며 행방을 찾았지만, 이미 늦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지. 케이크를 좋아하는 아빠에게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동생보다 일찍 집에 들어온 아빠에게 케이크는 결국 눈에 띄어버렸고,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졌다.
케이크를 좋아하는 아빠에게 좋은 케이크란 아주 큰 케이크이다.
어렸을 적, 몇 번째 생일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생일에, 아빠가 처음으로 케이크를 사 왔을 때였다. 처음에는 아빠 손에 들린 상자가 케이크 상자라고 생각지 못했다. 인형의 집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자, 열어 보자!"
기대에 찬 아빠는 입을 상자만큼 벌리며, 케이크를 꺼냈고, 신나 하던 나는 인형의 집 대신 동네 제과점에서 파는 엄청난 사이즈의 하얀 버터크림 케이크가 나오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잔뜩 눈썹이 내려가고, 삐죽 나온 입술 사이로 '히잉...' 하는 소리가 나오자, 아빠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왜? 케이크 엄청 크잖아 인마. 너 생일이라고 제일 크고 비싼 거 사 온 거야."
"이게 뭐야.., 엄청 커. 이상해."
엄마까지 합세해서 생크림 케이크를 사 오지 이게 뭐냐며 타박했고, 마음이 상한 아빠는 자기가 다 먹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흔히 으름장은 협박성으로만 끝나지만, 으름장이 사실은 계획 발표였던 것인지 아빠는 정말 그 케이크를 다 먹었다. 두 팔로 감싸 안을 정도의 사이즈였는데 그 큰 케이크가 사람 배에 다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빠의 케이크 사랑은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생일 모임 때, 밥 먹느라 케이크가 그대로 남으면 친구들은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누구이건 상관없이 내게 케이크를 포장해준다. 아버지 가져다 드리라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 아빠에게 케이크는 귀했을 것이다. 나의 할머니 되시는, 아빠의 어머니는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아프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제대로 된 생일상 하나 받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의 남다른 케이크 사랑은 결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나는 생일선물로 들어온 케이크 전부를 아빠에게 선뜻 줄 수 있다. 내겐 카페에 가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너무도 흔하고, 생일상의 케이크가 갖는 특별함이, 오래 전에 뿌린 향수처럼 옅어져 잔향만이 남았다. 생일 케이크 앞에서만큼은 58년생 아저씨의 얼굴은 아이와 같다. 저 먼 옛날, 반 백년 전, 부산 동래구의 고무신을 신고 있던 눈이 큰 아이.
남은 치즈케이크는 58년생 개띠 남자를 위해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안녕 치즈케이크, 안녕, 내일이면 못 볼 너에게 고하는 마지막 인사.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