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락앤락 반찬 통 한 가득 전이 남았다. 동태전, 산적꼬치, 오징어 튀김, 동그랑땡, 깻잎전, 스팸전 종류 별로 빠짐없이 남은 전들. 전은 해가 갈수록 쟁여 놓는 양을 줄여도 왜 늘 똑같은 양으로 남는지는 모르겠다. 남은 전 정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일까. 미스터리와 함께 남겨진 전은 이미 본연의 맛을 잃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에겐 '전 찌개'라는 메뉴가 있다. 해피투게더 야간매점 코너에서 김동완이 전 찌개를 소개하고, 최악의 요리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일 년에 단 두 번 그가 어깨를 펼 수 있는 날이다. 설, 그리고 추석.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전이 남았고, 보글보글 전 찌개를 끓여 보았다.
당신과 나의 열다섯 번째 이별 식탁
전 찌개 준비물 : 모둠 전, 묵은지(1/3 포기), 양파(1/2), 대파, 청양고추, 표고버섯, 육수, 새우젓 or 멸치액젓
양념 : 다진 마늘(1), 고춧가루(1), 양조간장(1)
전 찌개 만들기
자기만의 육수를 내주세요. 저는 육수 티백으로 우려내서 멸치액젓을 조금 첨가했습니다.
육수가 우러 날동안 양파 반개, 청양고추, 대파, 표고버섯을 손질해 놓고요.
묵은지 1/3 포기도 전 크기로 썰어 준비해두세요.
냄비에 전을 골고루 담아주세요. 예쁘게 세워서 가지런히 놓아주세요.
냄비 가운데 비워진 부분에 묵은지를 넣어주세요.
준비해둔 야채도 골고루 넣어주세요.
준비하는 동안 진하게 우려난 육수를 부어주세요.
가스레인지에 올려 보글보글 끓어주세요.
한소끔 끓고 나면 양념장을 골고루 풀어주세요.
다른 매큼한 양념장과 달리 고추장을 넣지 않았는데, 칼칼하고 담백한 맛이 배가 되었다. 전 찌개에는 고추장 없는 이 국물이 훨씬 어울린다. 그래도 처음 하는 찌개라서 아빠가 행여나 이 못된 비주얼과 황당한 맛은 무엇이냐고 생각할까 저어되서 최후의 보루로 계란 프라이도 차려냈다. 계란 프라이는 전처럼 남겨질 일도 내쳐질 일도 없다. 어디서나 사랑받는 계란 프라이. 이 사랑스러운 계란 프라이와 함께 아빠는 전 찌개로 밥을 남김없이 먹었다. 다행이다. 남은 재료를 소진하기 위해 전부 때려 넣어 만든 요리가 무슨 귀한 맛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선택받지 못한 아이들이 만들어낸 음식은 갓 손질해 만든 음식 못지않게 맛이 있었다.
찌개에 담가지지 않았더라면 기름지고 묵직한 전을 많이 먹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매운 국물에 절여지고 기름기가 빠지면서 담백하고 매큼한 맛으로 흰 쌀 밥과 어우러졌다.
조각조각 나 있던 내 인생의 짧은 자취들을 모아 이력서를 완성했을 때도 오늘 같았다.
만든 이가 보기엔 재미도 맛도 없는 자투리를 모아 만든 이 이력서가 자신이 없었지만 한 조각, 한 조각에서 나는 보지 못한 빛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려내버리고 싶은 기억들과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들로 엮여있는 인생.
상대의 조각보 옆에 두기가 민망한, 초라한 조각 덩어리로 여겨지지만, 내 인생에 버려도 되는 순간은 없다.
사기당했던 부끄러운 과거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쓰이기도 했고, 문을 닫고 상처로 남은 사업 경력은 많은 이력서 중 눈에 띄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 누군가를 좋아했다가 말 한마디 못 해보고 접은 따분한 짝사랑 이야기는 어떤 이와 친밀해지는 데 소재로 쓰였다. 그렇게 크고 작은 것들이 저마다 자기 때에 제 역할들을 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아빠를 미워했던 지난날들이, 아픈 거스러미로 남아 뜯어내지도 못한 채 자꾸만 거슬린다. 기어코 피를 보면서까지 뜯기를 원하는 내가 과거의 기억으로 속상하다는 말을 하면 아빠는 말이 없어진다.
학원 문을 닫고, 남은 빚을 정리하고, 그동안 지겹도록 애써왔던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을 때,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을 왜 비난하고 몰아세우기까지 했냐고, 누구도 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다만 그 기억으로 나는 아직 속이 많이 상한다는 고백에 아빠는 하던 말을 멈추고 만다.
내가 아빠를 미워한 조각의 크기와, 아빠가 나에 대한 이해를 거부한 조각의 크기는 같다.
쓰레기통으로 버릴 수 있었던 이 조각들은 기어코 한 집에 모였다. 오늘의 꽤 괜찮았던 전 찌개와 달리 깨끗이 정돈된 느낌이 없는, 이 잡탕 전골의 맛이 그리 기대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한 데 모여 끓고 있다. 미움과 거부로 얽힌 과거에 대한 미안함으로, 제 역할들을 해가며.
이것으로 족하다. 기적 같은 것은 바랄 일 없는 내게 이것은 족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