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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이별 식탁 : 비빔밥

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by 신보라 Oct 19. 2020
오늘의 저녁 식사오늘의 저녁 식사



내 나이 열일곱 때는 삼십 세 삼순이가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삼순이보다 두 살이나 언니가 된 내게 노처녀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런 게 시간과 시대의 변화가 아닌가 절감한다. 

삼순이는 실연의 아픔을 다이어트로 승화한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국룰이 있다면 이별 후 다이어트로 가는 메커니즘인가 보다. 갖은 채소와 오이지가 들어간 양푼 비빔밥을 먹는 언니와 엄마의 협공 앞에서도 다이어트의 적은 탄수화물이라며 스테이크를 썰던 그녀. 그녀는 결국 모두가 잠든 밤, 큰 양푼에 밥과 군침 도는 채소를 때려 넣어 비빔밥을 만든다. 한 술 가득 떠서 와앙 벌린 입으로 넣어 누구보다 맛있게 먹으며, 쓰디쓴 소주도 함께 털어 넣는다. 

산채비빔밥이 유명한 동네에 살면서, 비빔밥은 식당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산채비빔밥 식당이 즐비한 용문산의 고장이다보니, 즐겨 가는 비빔밥 식당 하나 쯤은 용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그러나 삼순이의 '야밤의 비빔밥 먹방'에 모두가 홀려, 비빔밥이 때아닌 야식 메뉴로 떠오르면서 열일곱 나도, 마흔셋 엄마도 집 비빔밥의 매력에 빠진 적이 있었다. 채소로 된 밑반찬을 거의 먹지 않는 성식 씨도 비빔밥의 채소는 걸러내지 않고 먹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던 비빔밥을 오늘 메뉴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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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과 콩나물 국, 예쁘게 익힌 달걀 프라이, 나물, 맛 좋은 고추장



당신과 나의 열아홉 번째 이별 식탁


비빔밥


비빔밥 재료 : 건호박, 건가지, 건취나물, 건 피마자, 건 곤드레, 건고사리, 고추장과 참기름, 달걀 프라이, 간 고기


비빔밥 만들기

적당히 찰기 있게 맛있는 쌀밥을 합니다.

간 고기를 중불에서 익히며 후추와 간장으로 간을 합니다.

쌀밥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기호에 맞는 나물과 고기를 얹어 줍니다. 

달걀 프라이를 예쁘게 구워서 제일 위에 얹어 주고, 고추장까지 덜어두면 완성!


조리 과정도 단순한데 맛도 좋은 이 비빔밥을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내가 이 비빔밥을 사랑합니다아아아아아으. 

목 막힌다고 혹시나 성식 씨가 불평할까 봐, 정확히는 그 불평으로 내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이 들었지만 쓸데없이 들어온 걱정, 내다 버릴 일이었다. 큰 면 사발에 가득 담은 밥을 한 알 남김없이 다 드신 성식 씨는 행복한 식사 후 기절하고 말았다. 택배 물량 대란에 피곤한 탓이었겠지만, 너무 맛있어서 뿅 가 버린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하며 켜진 그의 방 불을 달칵 껐다.


오늘 비빔밥 맛의 키 포인트는 쌀밥이었다.  찰진 정도가 적당해서 기특하게도 잘 비벼졌고 입안에서 나물과 어우러져 씹을 때마다 그 맛이 참 즐거웠다. 비빔밥 쌀의 찰기는 조금 부족하거나 넘쳐서도 안 된다. 딱 올바른 정도를 맞춰야 한다. 며칠 동안 꼬들했던 밥 때문에 기분마저 꼬들 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비빔밥의 키맨인 밥은 찰떡같이 잘 맞춰졌고 잠겨 있던 내 기분도 열려 오래간만에 콧노래가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집 밖에서의 일은 맘대로 되지 않아도 밥만큼은 완벽한 성공을 주기 위한 신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인간은 왜 사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짓누르던 오늘, 비빔밥을 통해 매일 먹는 쌀밥이 새삼 의미 있게 느껴졌다. 매일 먹지만 생각보다 사소하지 않은 존재였다. 음식의 맛과 내 기분까지 쥐고 흔들 수 있다니, 이런 요망한 아이.

 

아빠의 존재를 사소함을 넘어 잊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사소하지 않은 사이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쌀 때문이었다. 

부모가 자식의 결혼에 당연히 관여해야 하고, 심지어 자기 의지로 ‘자식의 결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부모였던 적이 없는 내가 감히 그런 생각을 평가할 순 없지만 성식 씨만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식 씨는 한때 '나'라는 짐을 치우기 위해서 결혼을 위한 포석을 끊임없이 깔고 또 깔았다. 만남을 주선하기고, 계속해서 결혼의 필요성을 주입하기도 했다. 내가 독립해 나가 살면서 결혼 강요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내게 키가 나만치 아담하고, 머리가 까진 부자 남자를 소개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내게 사건이었고, 참고 있던 스트레스 응어리는 터지고 말았다. 


“그 남자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면 아빠가 만나!!!!”


조금씩 표현했어야 할 화 덩어리가 속에서 성질머리를 먹고 자라다가 결국 폭발한 것이다. 아빠의 기가 막힌 행보에 더 기가 막힌 말로 대응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 그 남자 안 만나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 거야!”


나는 이 마지막 말을 저주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거역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내 여생에 대한 저주. 

처절한 배신감과 치미는 분노에, 결국 그날 밤 나는 아빠를 전화 차단 목록에 올렸다. 누구와의 손절도 쉬웠던 20대 말의 나는 이 정도의 궂은 마음이었다. 

6개월 간의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 평온함이 맘에 들어서 이참에 인생에서 지울까 하는 못된 생각도 들었다. 내게 상처를 가장 많이 주는 사람은 아빠였으니까. 번호와 함께 상처도, 성가신 일도 차단한 나날은 편안했다.

그렇게 아빠를 인생에 지워가던 그때. 친구가 차 트렁크에 쌀 두 포대를 싣고 찾아왔다. 농사를 짓는 친구 아버님께서 나에게 쌀을 보내셨다고. 우렁이농법으로 지은 친환경 쌀이라고 했다. 한 포대를 우리 집에 올려준 친구는 내가 잊어가던 사람, 아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나머지 한 포대는 성식 씨 거라고. 이 쌀은 그냥 쌀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빠와 화해시키려는 친구의 '평화의 쌀 포대'였다.

몇 번의 거절과 앙탈이 있었지만 친구는 결국 나를 태워서 성식 씨의 집으로 갔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난 아빠는 무척 반가워하곤,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내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넌 애가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


멋쩍게 넘어가던 전과 다른 원망과 야속함에 절어 있은 말이었다.

낳아서 키운 딸자식이 생사 알림도 없이 차단해버렸으니 아빠 속은 말할 수 없이 멍이 들었을 것이다. 파랗다 못해 검게. 그렇게 상해갔을 것이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몰랐겠지만, 나는 마음이 상하면 그런 식의 연락두절도 가능한 년이었다. 날을 세우고, 나를 향한 모든 질책과 손가락질에는 그보다 더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속이 편해지는 꼬일 대로 꼬인 년이었다. 힘든 일이 많았던 내가 나를 유일하게 세우고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힘들 때 유일하다고 생각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꺼내 보면 하나같이 다 썩어 있는 것들 뿐이다. 


일은 잘 풀리지 않아도 인복은 타고났는지, 내 못된 심보를  두고 볼 수만 없었던 친구 덕에 6개월 간 끊겼던 핫라인은 다시 연결되었다.

지독한 말로 상처를 주는 아빠와 지독한 행동으로 되갚고 마는 나는 환상적으로 닮은 부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쌀을 씻고 밥을 안칠 때면 그때의 너저분했던 내 마음과 우리의 관계가 떠올라 다시 쌀을 벅벅 씻곤 한다. 그리고 늘 물의 정량을 잘 맞추기 위해 모든 시세포를 곤두 세운다. 적당한 찰기를 얻기 위해. 

사소한 우리의 대화와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적당한 지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탐색을 하듯, 그리고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 조금 더 성숙하고 적절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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