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식탁 차리기
나는 바쁜 것을 참 싫어한다. 바쁨은 해악이다. 바쁜 게 얼마나 좋지 못하냐면, 바라만 봐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고양이들의 칭얼거림에도 짜증이 나고, 스케줄러는 쓰지 못한 지 2주나 되었다. 내 온전한 삶은 스케줄러의 마지막 날에 멈춰있는 듯 하다.
바쁨은 소중한 것들을 성가시게 만든다. 나는 이런 바쁨이 끔찍이도 싫어서 서른 두 해 간 피해 다녔다. 그러다 가끔 술래잡기에 패배해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우울해서 아이처럼 울곤 했다.
지질하게 눈물이 많은 내게,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순간들은 너무나 무서웠고, 좋아하는 것들을 소중하게 대해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밉다 못해 무너지게 되는 일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나는 여전히 그렇다. 저 지질한 우울의 과정은 내 세포에 각인이 되었다.
2020년의 가을과 겨울,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퇴근 후에 휴식을 꿈 꿀 새도 없이 강의를 듣거나 과제를 해야 했다. 틈이라도 날라치면 다른 사람들과 엮여 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자연히 스스로에게 준 일거리들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점점 더 쉽게 밀려났다. 고양이들은 화가 났다. 퇴근 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는 집사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두 고양이가 번갈아 악다구니를 썼다.
"이럴 거면 같이 왜 사는 거냥!!!!!!!!!!!!!!"
"참을 만큼 참았다냥!!!!!!!!!!!!!!"
내 눈도, 손도 갈 길을 헤매다, 결국 실소가 터졌다. 미안해 아기들아, 아무리 바빠도 잠깐잠깐 놀아 줄 수는 있는 건데. 나는 참 핑계 덩어리 인간이구나.
오전부터 임금체불 해결을 위해 여주 법률공단에 갔다가, 마지막 학기 수강지도를 위해 인천으로 이동후, 근처 녹음실에서 라디오 녹음까지 한 정신없는 일정을 보낸 날이었다. 일찍 일어난 새들이 모이를 먹는 시간부터 시작된 일정이, 지하철에 취객들만 남은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대장정에 풀 죽은 파김치가 따로 없었다.
아빠는 서른두 해나 된 풀 죽은 파김치를 향해 눈을 흘겼다. 네가 저녁밥을 안 차려 줄 때마다 다음 날 일하기가 얼마나 힘든 지 아냐며. 해야 할 일 가장 우선순위에 꼭 식사 차리기가 있야 한다며, 갑자기 거실 한 가운데서 웅변을 제창했다. 파김치가 풀이 죽었던 것은 화가 부족해서였을까, 갑자기 치솟는지 펄쩍펄쩍 뛰었다.
"그게 왜 제일 우선순위야? 내 우선순위는 내 일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오늘의 이별 식탁
감자를 얇게 썰어주세용. 그리고 채채채채채 채 썰어요.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 위에 채 썬 감자를 올리세요. 피자 도우가 될 테니까 얇은 쿠션처럼 올려주세요.
익으면 뒤집어 주세욧
뒤집은 감자채 위에 케첩을 얇게 펴 발라주세요.
그 위에 송송 썬 파와 소시지를 올리고 피자소스를 눈 뿌리듯 뿌려주세요.
뚜껑을 덮고 약불로 줄여주세요. 모두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감자채 피자 완성!
늘 그렇듯 아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꾹 다문 입에서 '저 기집애가 또 시작이구나' 라는 글자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꼭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지랄발광 미친 아이가 바로 나다. 평소에는 가만있다가도 대체 무엇이 미친 아이의 뇌관을 건드리는 것인지 미친 아이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식사를 우선순위에 두라는 말도 평범한 아버지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몇 주 간 부실한 밥상과 일주일에 한두 번씩 언질도 없이 빼먹는 식사에 그도 무언의 불만이 쌓였으리라.
주말이 되었고 미친 아이는 여전히 바빴다. 그러나 평일보다는 나은 컨디션 덕에 그 기운을 화내는 데 쓰지 않고, 오래간만에 브런치 겸 간식 겸 생색 거리에 쓰기로 했다. 간단 요리 전문 유튜브 채널 하루한끼에서 본 감자채 피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언젠간 꼭 해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이보다는 좀 더 행복한 날, 여유 있게 만들고 싶었는데, 화쟁이의 시간 운용은 늘 이런 식이다. 화내고, 미안해서 계획에 없던 일을 벌이는 것의 반복. 계획에 없던 요리는 진심이 부족했던 탓인지 감자의 전분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무튼 여러 이유로 채 썬 감자끼리 잘 붙지 않는 위기에 봉착했다. 급하게 튀김가루를 물에 섞어 채 썬 감자 사이사이에 입혔다. 덕분에 원했던 것은 바삭한 도우였지만, 감자 전이 만들어져 버렸다. 괜찮았다. 감자전도 맛있고 비주얼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원래 잘생긴 게 제일 이로운 법.
PMS 증후군으로 입맛이 없었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손이 덜덜 떨렸다. 결코 알코올 중독자도, 다이어터도 아니었지만 내 손은 사시나무처럼 달달달달 떨기를 멈추지 못했다. 피죽도 못 먹은 거지치곤 장대한 기골을 가진 미친 아이는 감자채 피자 한 조각만 먹고도 만족스러웠다. 자신조차 챙길 새 없던 몇 주였다. 가장 성가셨던 나 자신을 챙기는 이 순간이 반갑고 멋쩍었다.
유튜브를 보며 감자채 피자를 먹은 성식 씨가 거실로 나왔다. 초점 없이 식탁 끝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성식 씨가 말을 걸었다.
"너 그.., 월급 문제는 잘 해결됐나"
말에는 멋쩍음과 어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제 시작 인디. 두 달쯤 걸리겄지"
"뭐 그리 오래 걸리냐. 거참."
더 멋쩍어진 성식 씨는 괜히 회사 대표와 느린 소송 과정을 탓하며 다시 그의 작은 성으로 들어갔다.
문득 그의 뒷모습을 보니, 성가시다 라는 것은, 바쁜 나를 위한 거짓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