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니 조이, 노순옥 옮김, 2021
1. 제목부터 불편한 책
이런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움과 앎이라는 것은 실천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이런 책을 좋아할 수가 없다.
일단, 읽기 전부터 어떤 실천을 다짐해야 할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어렵고 불편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아는데, 그래 알겠는데, 나 힘들어~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배우며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필연적으로 불편함과 힘듦을 굳이 감수하는 것인 듯하기에 책을 2번 정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2. 동물, 비인간
내가 이런 주제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었나?라고 질문해 보았다.
질문보다는 집에 있는 책장과 책을 구입하는 온라인 사이트를 뒤적여 보았다.
이런, 역시나 있었다.
꽤나 유명한 책 들이었다.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탬플 그랜딘과 캐서린 존슨의 동물과의 대화, 동물과는 좀 결이 다를 수 있지만, 삼체 덕분에? 유명했지만 더 유명해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 등등등
적어도 10권 이상은 관련 책을 읽어본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도, 책을 읽기 전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지식은 지식일 뿐, 삶과 실천과는 다르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온 것일까.
그래도 뭐 어떻게 해. 한국에서 비건으로 사는 게 쉬운가라는 현실에 대한 수용일까.
그도 아니면 그냥, 그럴듯한 타협일까.
잘 아는데, 나 힘들어, 돈도 없고 매일매일 다른 거 신경 쓸 것도 많은데 그냥 살면 안 될까라는 하소연일까.
잘 모르겠다.
근데, 잘 모르면 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잘 모르는데 할까? 심지어 그것이 누군가, 무엇인가의 생명과 삶을 뺏는 일인데.
자, 일단 여기까지는 책을 펴기 전에 혼자서 표지를 읽고 한 생각이다.
글이 너무 길어지고 두서 없어지기 전에 책으로 들어가야겠다.
3. 멜라니 조이, 육식주의(carnism)
저자, 멜라니 조이는 심리학자이자 비건 운동가다.
그리고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육식주의(carnism)'의 창안자이다.
즉, 동물을 먹는 행위에 내재한 이데올로기, 관점과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그것을 육식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초반부에 보면 '명명'하는 얘기가 많다(멍멍이 아니다.. 그냥 내가 가끔 헷갈린다).
명명이란 '사람, 사물, 사건 등의 대상에 이름을 지어 붙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명명하지 않거나, 명명되지 않으면 그것은 쉽게 가려지고 잊힌다.
그리고 그러한 비가시성은 방향성을 잃게 하고 무감각하게 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이 취급되게 한다.
우리에게 조금 더 쉽게 와닿는 예시는 아마 제주 4.3 이야기 일 것이다.
4.3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 명명할까.
4.3은 보통 사건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꽤나 최근까지 그리고 지금도 일부는 4.3을 폭동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도 4.3 피해, 4.3 비극, 4.3 학살 등으로 불린다.
4.3은 1948년 이후부터 계속해서 있어온 사실인데, 그것을 명명하는 방식은 다르다.
명명에 따라 일어난 일에 대한 해석과 접근, 방향성 등이 매우 달라진다.
그리고 어떻게 명명되느냐에 따라서 중요시되는 이야기도 달라진다.
이처럼 개는 사랑하는데, 돼지는 먹고 소는 신는 것.
특정 동물은 먹어도 되고 다른 동물은 안 되는 것.
동물 자체를 무분별하게 먹는 것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고, 그 안에 내재된 특성을 파악하는 것 즉, 명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서문 맨 끝 문단에 유발 하라리가 말한 내용은 책의 핵심을 잘 담고 있다.
전 지구적인 동물 착취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엇이 이를 지속시켜 주며, 이 시스템이 어떻게 수십억 동물에게 견딜 수 없는 부담을 주는지를,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은 이에 관심을 갖거나 상황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은 우리가 '육식주의(carnism)'의 틀 밖으로 나가 보다 나은 위치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사태 해결에 한 역할을 함으로써 좀 더 동정심 많고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도와준다.
p.27
우리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먹는 육식과 동물을 죽여도 괜찮은 삶의 태도와 인식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명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4. 와닿다
일단 뭐, 책에서 이게 정말 중요한 내용이다!라는 식보다는 말 그대로 내가 와닿은 것 중심으로 추려본다.
요약과 리뷰는 말 그대로 요약과 리뷰이다.
책의 정확한 내용은 책을 읽고 문장과 문장, 문맥과 문맥, 앞장과 뒷장을 연결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읽어 보시길.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의 고기에 대해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그것들 간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달리 인식하기 때문이다.
p.31
핵심적인 문장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넌 왜 개, 고양이 먹는 거는 혐오? 어려워? 하면서 돼지는 그렇게 잘 먹고, 소는 그렇게 잘 신고 잘 입어?라는 질문이다.
개고기랑 돼지고기가 다른 거야? 똑같은 동물의 살인데..?
결국 개와 돼지가 다른 게 아니라,
개와 돼지를 인식하는 우리가 다른 것, 우리의 인식이 다른 것을 말한다.
근데 이게 뭔 상관이야!!라고 할 수도 있다.
근데,, 상관이 있을 거다.
결국 이런 인식과 태도가 동물에서 인간으로 또는 식물과 환경으로, 나보다 약한 어떤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쭉쭉 뻗어나가고 그 모든 것은 연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골든리트리버 고기(자극)-먹을 수 없는 동물(믿음/인식)-살아 있는 개의 이미지(생각)-혐오감(감정)-먹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함(행동)
p.34
위의 인식, 지각 과정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먹을 수 없는 동물'이라는 믿음과 인식이 중요하다.
왜 그런 인식이 생기는 것인가?
혹은 왜 그런 인식이 생기지 않는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수십만 종의 동물 가운데 우리가 혐오감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째서 극소수뿐인지 궁금해한 적이 없는가?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의 선별에서 놀라운 점은 혐오감의 존재가 아니라 그 부재(그곳에 있지 아니함)다.
p.38
답이다. 바로 위에 했던 질문의.
부재하다는 것은 명명되어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와 연결점이 희미해진다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의 실체에 대해 직면하고 부딪칠
기회마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 부재는 잊혀지고, 있지만 없는 것처럼 되어간다.
저자가 수업에서 학생들과 한 대화의 내용. 대화 내용보다 저자의 질문만 적음
'왜 돼지가 게으르다고 하지?', '돼지는 왜 멍청하지?', '왜 돼지가 땀을 흘린다고 했지?'
'돼지는 다 못생겼어?', '왜 돼지 보고 더럽다고 하지?', '개들은 더러운가?'
'돼지를 본 적이 있어?', '개가 충성, 영리, 귀엽다고 하는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지?'
'돼지도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왜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는 걸까?'
원래 그런 것이다? 이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아주 곰곰이. 우리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종은 도축장으로 보내고 다른 종에게는 사랑과 친절을 베푼다.
-중략-
치약 하나를 고를 때도 진열대 앞에서 오래 망설이는 사람이 많은데, 어떤 동물을 왜 먹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니.
p.45-51
저자의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은 '원래 그런 것',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참 일상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 학생과 교사, 친구와 친구, 연인 사이, 부부 사이, 직장 상사 혹은 동료 등.
원래 그런 것은 관례적인 것이다. 습관적인 것이고.
그것이 다 나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관례와 습관에 녹아있고, 그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다.
관례를 정말 따르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사람으로서도,
제발 좀 특별하지도 않으면서 생긴 대로, 맞춰서 좀 살아!라는 말을 많이 들은 사람으로서도,
그럼에도, 원래 그런 것이 주는 유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냥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유익하게 하는지를.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치약 고를 때도 고민하면서,,
고민 좀 해봐!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확고히 자리 잡았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그 한 예가 가부장제(patriarchy)이다.
이는 남성성을 여성성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여성보다 남성이 사회적 권력을 많이 갖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다.
가부장제가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략-
확고히 들어선 이데올로기가 그 상태를 유지하는 주된 방법은 계속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아 있는 주된 방법은 계속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p.57-58
명명이다.
이름을 정해야만 드러나고
이름을 정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
그 이름 속에 그것의 본질이 담기는 경우가 많다.
매력적인 문장이다.
나도 명명. 이름 붙이기를 하고 싶다.
마치 낸시 프레이저가 자본주의에 대해 단순히 경제적 시스템이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 질서'라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시대와 사회, 개인과 개인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름 붙이기는 매력적이다.
그것을 통해 진실과 이면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분쇄 한 소, 돼지 토막, 양의 다리를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프(beef), 포크(pork), 머튼(mutton)이라는 명칭이 훨씬 더 식욕을 돋운다.
-중략-
도살(slaughter)이라는 단어 대신 가공(process), 수확(harvest)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
육식주의 산업 쪽에서는 '인도적'인 고기와 알, 유제품을 생산하여 사람들에게 선택지로 제시한다. 그 동물들이 기꺼이 제 몸을 식용으로 내놓았다는 듯이.
p.79, 106
어떤 것에 대해 교묘하게 언어를 바꾸는 것.
그리고 뭔가 그럴듯하게 방향을 바꾸는 것.
하지만 본질은 그대로인 것.
그들은 육식주의적 생산에 관한 논의에서 거의 도외시된다. 그들 역시 보이지 않는 희생자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식육을 생산하는 공장의 일꾼들, 오염원을 배출하는 동물 밀집사육시설 부근의 주민들, 육식주의 소비자, 납세자들이다. 바로 당신과 나다.
p.116
그래.
동물,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고민. 배려. 함께함이 중요하지만
결국, 그래서 인간은 진짜 좋고 행복해지는 거야?라는 고민이 우리에게는 더 현실적이고 중요할 수 있다.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그럴 수 없다고.
p.128에서 저자는 무감각해지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수록 괜찮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쌓이고 심적 외상을 입게 된다고 한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희생 또는 파괴나 착취 위에 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짜 잘 살 수 있는지를.
동물을 먹는 것에 관한 방대한 신화들이 있지만 그 모두는 내가 '정당화의 3N'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동물을 먹는 일은 '정상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는 논리 말이다.
p.148
위에 설명한 내용과 이하 동문이다.
정상, 자연, 필요라는 것으로 합리화될 수 있는 것들인가.
설령 경제가 육식주의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의존이 폭력의 지속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p.171
뼈 때리는 말이다.
하지만 의존은 대개 폭력의 지속을 정당화한다.
의존하기 때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대표적인 예가 아동과 장애인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탈의존, 자립을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또 생각해 볼 지점은. 의존이 대개 폭력의 지속을 정당화하는 것은 맞지만
꼭 그런 식으로 만 작동하는가이다.
아니다. 의존은 폭력이 아니라, 협력과 상호 호혜, 개인의 약함과 연대를 불러올 수도 있다.
어떤 의존은 폭력을 불러오고, 어떤 의존은 연대를 불러온다.
근데,,, 위에 문장은 이 논의가 아닌 것 같긴 한데,, 하하
대상화(objectification): 살아 있는 존재를 생명이 없는 물체, 하나의 물건으로 보게 되는 과정
몰개성화(deindividualization): 개체를 집단 정체성의 차원에서만 보면서 그 집단의 다른 모든 개체와 똑같은 특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
이분화(dichotomization): 존재를 두 개의 대립되는 범주로 나누는 것. 왜곡된 인지로 이원화시키는 것
p.178, 180, 185
10번째쯤 쓰려고 하니 힘들다.ㅋㅋㅋㅋㅋ
아,, 괜히 메모 많이 했다. 읽는 사람도 지겹겠다.
아래부터는 그냥 쭉 읽어보시라.
심리학자들이 이름 붙인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혹은 톨스토이 신드롬: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가정들에 맞는 것만 인지하고 기억하는 경향
p.198-199
생각해 보라.
인류 역사에서 저질러진 사실상 모든 잔혹 행위는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직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대중들이 고개를 돌렸기에 가능했으며, 반면에 평화와 정의를 위한 모든 혁명은 증언하기를 결심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권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p.208
육식주의를 거부하며 증언의 실천을 하는 삶
1. 매끼 식사를 가능한 한 비건 식으로 할 것
2. 비건주의 단체를 하나 골라 지원할 것
3.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관련 지식과 정보를 입수할 것
p.219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비젤은 이렇게 말했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이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p.225
저자 후기.
이 책은 10주년 기념 개정판이다.
그래서 책 후기에 저자는 책을 쓰고 난 후 10년 동안 마주한 혹은 발전한 육식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육식주의(neocarnism) 즉, 동정적 육식주의와 생태육식주의, 생명육식주의 등이다(영어는 귀찮아서 안 적었다).
동정적 육식주의는 '인도적인' 고기와 알, 유제품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생태육식주의는 비건주의를 단순 하나의 트렌드, 일탈적 경향으로 보고, 과민, 결벽, 현실과 단절되었다고 생각한다.
생명육식주의는 동물을 먹는 것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고 이에 윤리적인 부분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비건의 삶을 살면서 관계가 단절되고 관계에서 겪는 다양한 변화들에 대한 부분도 언급한다.
자. 이제 책을 다 읽었다.
나는 이제 비건으로 살 것인가.
적어도 그것을 지향하는 실천을 할 것인가.
혹은 전혀 책에 동의하지 못하고 그대로의 삶을 살 것인가.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대로인 상태를 보류한다.
생명, 동물에 대한 파괴적인 행동, 착취 인정한다.
개는 사랑하면서 돼지는 먹고 소는 입는 것이 타당한 논리가 아님을 인정한다(사실 난 개를 사랑하진 않지만..)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부분이 있다.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희생 위에 기반되지 않는 삶은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과 식물의 희생시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동물의 고통의 문제인가? 식물의 고통 없음 인가?
고통을 가장 큰 기준으로 파괴, 희생, 착취를 나눌 수 있는가?
동물의 범주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공장식으로 생산해 내는 종류의 동물만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일단 이런 생각까지 오면 반은 실패한 거다..
지나친 생각이 꼬리를 물면 결국 당장에 내려지는 결론은 타협과 회의주의이다.
하지만 칸트가 그랬지(칸트 맞을 거야.)
회의주의는 인간 이성의 쉼터라고. 우리는 거기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고.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회의주의와 혹은 회의주의 속에서 또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들을 반드시 마주할 것이니까
휴.
나에게는 개와 돼지와 소의 다름과 같음이 문제가 아니다.
공장식, 밀집 사육의 문제도 아니다.
나에게 문제는, 우리는, 나는 무엇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이다. 또는 무엇을 희생시킬 수 없는가(희생시키면 안 되는가)이다.
사실 그냥 고기 먹고 싶어서 합리화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부터 다시 비건, 환경, 비인간 등에 대해 공부할 거니까.
어쩌면 육식을 합리화하는 한 인간의 비건 시작기. 출발기. 투쟁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거 아는가.
사실 이 글은 아주 짧게 쓰려고 다짐하면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