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귀연, 2019
1. 소개
일단 이 책은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읽다가 실패해서 도달한 책이다.
실패라 함은, 읽기 어려워서, 2차 자료?를 통해 선 이해를 쌓기로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을 읽고는 아마,,!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읽을 것 같다.
소개 1
일단 책의 저자를 소개한다.
심귀연 박사는 메를로 퐁티의 자유 개념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포스트 휴먼과 장애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관련해서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유튜브도 있긴 했다!
최근 포스트 휴먼에 좀 관심이 있는데, 다음에 관련 책도 읽어 봐야겠다.
소개 2
먼저 이 책은 총 3부로 나눠져 있다. 1부는 메를로 퐁티의 생애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가 살았던 삶과 시대적 배경, 가족과 지인 등.
뭐랄까. 중학교 시절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우면, 공식보다는 피타고라스는 왜, 어떤 마음으로 이런 정리를 만들었는지가 더 궁금했던 나에게는 흥미로운 챕터였다.
1부의 시작은 퐁티의 전반적인 삶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단 퐁티는 53세(1961년)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 같은데,
쓰러질 때 그의 책상 위에는 데카르트의 '굴절 광학'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퐁티는 1908년 프랑스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비교적 괜찮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926년 파리의 프랑스 최고 엘리트 학교인 고등사범학교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입학한다.
여기서 퐁티는 실존주의로 유명한 사르트르를 알게 되고 보부아르도 알게 된다.
*참고로 이 학교는 베르그송, 뒤르켐, 시몬 베유, 알튀세르, 푸코, 부르디외 등도 졸업했다.
퐁티는 고등사범학교 재학 시절 사르트르와 친해질 기회가 그다지 없었다(사르트르가 3년 선배였기에).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내에서 몇몇 학생들이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던 것에 대해 퐁티가 경고하는 일이 있었다.
그 경고에 화가 난 학생들이 퐁티를 폭행하려 했을 때, 사르트르가 퐁티를 구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친해졌다고 한다.
여기서도 둘의 성격을 조금 엿볼 수 있는데, 퐁티는 매사에 진지했고, 사르트르는 저돌적이고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재회하면서 학문적, 정치적 동지로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1943년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를 1945년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을 펴낸다.
사실상 이 두 책은 그간의 퐁티와 사르트르의 학문적 대화라고 해도 될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1945년 '현대'지를 창간해서 1952년까지 같이 활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계기로 결별하게 된다.
(퐁티는 마르크스주의가 공상이었음을 깨닫고 방향을 전환하지만, 사르트르는 한층 더 마르크스주의적 정치 태도를 보임)
1부의 내용은 이어서,
퐁티의 사랑, 연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라쿠엥이라는 연인이 있었지만 이어지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보부아르와 틀어진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부아르가 자신의 절친 라쿠엥을 퐁티에게 소개해 줬다)
음. 내용을 간추려 말하면, 라쿠엥의 청혼을 퐁티가 침묵으로 거절? 한 이야기이다.
그 거절은 사랑하지 않음이 아니라, 라쿠엥 집안에서의 반대와
퐁티 자신의 집안의 사정(퐁티는 어머니의 혼외 자식이었다)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퐁티의 마음? 상황? 이 지각의 현상학에 아주 살며시 녹아들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다 설명하려면 아주아주 길다.
퐁티가 학자적인 진지함을 가졌으면서도 당시 유행을 따랐고, 춤추기를 즐기고 낭만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라캉과의 인연.
데카르트적인 반성철학에서 찾을 수없던 목마름과
베르그송의 철학 안에서 새로움을 찾아 헤매던 도중 후설의 현상학을 만난 이야기 등등.
이러한 이야기들 안에서 내가 느낀 것은 확실히 한 사람의 철학적 사유 혹은 삶의 방향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경험이 너무나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것을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어떤 지점(철학, 사상 등)을 만나면서 극대화되는 것 같다.
마치, 파이어아벤트 같은 학자가 과학, 종교, 점성술, 미신이 전부 다 비슷한 것이며 다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외치며 과학의 위세? 에 반대한 것이, 그가 겪은 몸의 아픔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치료(의학, 한의학, 민간요법 등)의 경험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개 3
다음은 2부로
여기서는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과 이를 이어받고 확장시킨 퐁티의 현상학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똑같이 현상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확장시킨 사르트르와 퐁티의 차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소개 4
마지막 3부는 퐁티의 현상학은 그래서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다.
즉, 퐁티가 강조한 몸의 현상학. 지각의 현상학은 도대체 무엇이며,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몸을 넘어선 살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되는 그의 논의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소개 3과 4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이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현상학(에드먼드 후설)
일단 현상학이 뭔지 알아야 한다. 즉, 후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일단 후설은 독일의 철학자로 1859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다.
후설은 수학자로 학문적 시작을 하지만 이후 수리철학, 논리철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다가
1911년경부터 그의 철학은 현상학으로 자리매김한다.
아래의 내용은 후설이 현상학으로 접어들게 된 계기를 잘 설명해 주는 문장들이다.
근대 이래 자율적인 개인이 등장하고 자유 개념이 확립되었지만, 그 자유는 또 다른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모든 개인은 법 앞에서 자유롭다. 법 앞의 자유란 공적 자유를 말한다. 물론 사적 존재로서의 개인도 자유롭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근대의 자유는 구체를 잃고 추상으로 남았다. 근대는 인간의 자유를 입으로만 외칠뿐 오히려 획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를 갈망하게 했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삶의 방식은 삶의 구체성을 외면하고 삶을 추상화시켰다. 구체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특성 때문에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객관성을 상실한다. 결과적으로 추상만이 실재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우리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삶은 현실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삶과 학문, 이론과 실천, 구체와 추상은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될 뿐 아니라 구별되었다.
p.11
학문의 목적은 진리 탐구에 있다. 문제는 그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있다.
플라톤은 영혼이 진리의 세계에 살았던 탓에 순수한 영혼을 지킬 수만 있다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데카르트도 이성에 진리를 찾을 의무를 부여했지만, 방법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더 이상 의심할 수없이 존재하는 한 가지, 즉 코기토를 찾고 그것을 학문적 토대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코기토를 정신적 실체로 간주하며, 주관과 객관의 영역을 분리했다. 그로 인해 근대철학은 불가지론의 입장을 가지게 된다(유아론에 빠지며).
현상학은 근대철학이 포기한 신비에 다가갈 방법으로, 현상 너머에 있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존재는 현상 그 자체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기에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라!'는 모토를 가진다. 이를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은 '의식'의 차원에서, 사르트르는 '자아', 퐁티는 '몸'의 차원에서 그 본질에 접근한다.
p.87-89(책의 내용을 요약 및 간편하게 재구성함)
후설이 현상학을 새로운 학문으로 정착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살던 당대 유럽인의 삶과 학문에서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있었다. 근대과학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고, 이러한 성과에 경도된 유럽인은 모든 학문과 삶을 자연과학이 제공한 방법론에 따라 판단하려 했다. 후설은 이러한 태도가 다양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훼손한다고 진단한다.
-중략-
근대철학의 심각한 문제점 중 하나는 모든 것을 '경험적 사실'로 환원하려 한다는 점이며, 또 다른 하나는 존재 및 인식의 원리를 일반화해 무차별하게 적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현상학은 경험적 사실로 환원하는 자연적 태도를 '판단중지'라는 현상학적 태도로 전환하여 취한다. 이때 비로소 '사물 자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후설은 말하고 있다.
p.90-91
즉, 현상학이란 근대철학, 근대사회가 말하는 합리적, 이성적, 객관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파악할 수 있다는 인식론의 전제에 태클을 거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의 이면에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현상 그 자체에 주목하며, 보편성의 틀 속에 구체성을 밀어 넣어 일반화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93).
그리고 이는 근대인의 학문적 태도와 삶을 비판하는 것이며, 그들이 의심 없이 믿는 실증주의적 세계를 자연과학이 덧씌운 세계로 보는 것이다(94).
짧게 후설의 현상학에 대해 소개했지만, 사실 현상학은 명실상부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큰 5~6가지 줄기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간단하지는 않다.
(*현대철학은 수많은 분파? 와 사조가 있겠지만 크게 심리학/현상학, 실존주의/구조주의, 탈구조주의/분석, 언어철학/과학철학, 실용주의/과학, 수리철학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개념 외에도 경험이 어떻게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지(자유 변경을 통해서),
자연적 태도에서 현상학적 태도로의 관점을 변경하는 현상학적 환원과 판단중지는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현상학에 대한 깊은 고민은 현상학을 직접 다룬 책에서 해야 할 듯하다.
일단, 퐁티가 현상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의 철학적 노선이 후설의 현상학에 기대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될 듯하다.
3. 현상학(메를로 퐁티)
그렇다면, 퐁티의 현상학은 뭐가 다른가.
퐁티는 분명 후설의 현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을 확장했다. 바로 '몸'을 통해서.
퐁티가 확장시킨 몸의 현상학. 지각의 현상학이 무엇인지 아래의 문장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퐁티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적 사유가 남긴 영혼과 육체, 이성 중심주의 등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몸과 살이라는 구체적인 실존의 근거 위에서 인간과 세계를 통합적으로 사고했다.
p.14
전통적인 철학은 구체적 삶의 영역에서 한 발 떨어져서 삶을 관조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철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은 그것의 기반이 구체적인 삶에 있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사유 과정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삶에 직접적인 효용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철학의 문제들은 인간의 삶에 관한 본질적 문제들이며, 이 문제들은 어떤 특정한 시대 상황 속에서 그 구체성을 드러낸다. 현상학자로서 퐁티는 철학을 구체적 삶에서 절대 떼어놓지 않았다.
p.48
근대의 이분법적 구조는 세계를 모두 두 개로 나누었다. 정신과 물질, 개인과 사회, 너와 나, 여자와 남자, 흑과 백 등. 이로써 두 개의 세계는 소통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잃었다. 그러나 몸에 대한 퐁티의 새로운 이해로 몸은 사실상 새로운 몸이 아닌, 몸의 본래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근대가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인 이분법은 해소되었고, 학문의 영역에서 진리의 문제와 동시에 삶의 근원적인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퐁티에게 몸과 몸 지각은 그의 현상학을 이루는 핵심적 개념이 된다. 퐁티에게서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역사는 머리가 아닌 몸의 개입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몸성이자 공간성 그리고 시간성이며 역사의 부피를 품게 되는 것이다.
p.120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도달하는 선험성의 영역은 의식이 아니라 바로 '몸'이다. 몸이야말로 우리의 체험이 이루어지는 장이자, 세계와 직접 교섭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일 선험성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지각 또는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몸이어야 한다.
-중략-
퐁티가 보기에 후설의 환원은 선험적 의식으로의 복귀이므로, 그가 말한 환원은 데카르트 철학의 투명성과 다르지 않다. 퐁티는 세계의 투명성이 가능한지 묻는다. 환원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세계의 투명성, 자아의 투명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127
나는 하나의 의식이지만, 내가 몸적 존재이므로, 내 의식 또한 몸 의식이다. 그런 이유로 의식은 하나의 몸, 질료적인 몸이다. 몸과 의식은 불가분리로 엮여있다. 세계와 내가 그렇게 얽히고 엮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퐁티의 철학은 애매성의 철학, 즉 관념적이면서도 유물론적인 철학이다. 이는 퐁티의 몸 철학에서 분명히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p.137
음,,
일단 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적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하지만 후설 역시 현상을 파악하는 것에 있어 의식을 초점에 두었으며, 이는 결국 데카르트, 근대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는 우리의 몸과 세계는 여전히 기계론적으로 파악된다(165).
그리고 이성은 몸을 지배하는 것이 되고, 몸은 마치 껍데기? 인 것처럼 된다.
그래서 퐁티는 지각을 감각과 구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저서의 이름이 '지각의 현상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이러한 퐁티의 논의는 고대, 중세의 목적론적 세계관,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것이다.
즉, 세계는 주어져 있지만, 주어진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는 온몸의 지각을 통해 열리는 지각의 세계이자, 삶의 세계라는 것이다(211).
퐁티는 이러한 주객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몸의 철학에서, 후기에 갈수록 '살'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객의 교차를 설명함으로써 이분법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려고 한다.
'살'의 개념은 더 이상 자아와 타자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없고, 완전히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의 개념은 잘 이해하지 못해서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4. 마무리
좀 부랴부랴 마무리하는 것 같지만 일단, 끝내야겠다.
맨 처음 언급했듯이, 이 책은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읽다가 실패해서 보게 된 책이다.
퐁티가 애매성의 철학자? 여서 그런 것인지,
읽을수록 알 것도 같으면서도 모를 것도 같은 기분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1년 반쯤 전에 후설에 대해서 겉핥기지만 책 한 권을 본 것이 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다..
흥미는 있는데, 이해는 못 하겠는..? (근데 이해 못 하는 어떻게, 어떤 지점에서 흥미가 생겼을까..)
아무튼! 퐁티 덕분에 거의 한 달은 다른 책을 못 읽은 것 같다..ㅎㅎㅎ
퐁티를 살포시 마음 한편에 두고 언젠가 다시 만나야겠다.
아.. 사르트르 얘기는 뭐,, 꺼내지도 못했다.. 실존주의도..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