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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감있는 그녀 Sep 17. 2024

[엄마의 단어] 명절


명절

: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

: 설날, 대보름날, 단오, 추석, 동짓날 따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추석 명절날입니다.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긴 연휴에 엄마의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미혼 시절이 떠오르네요.

늦잠 자다가 남자친구와 날씨 좋은 가을날 데이트도 하고, 제사가 없던 친정집이라 가족 나들이도 나갔습니다. 생각만 해도 참 좋았시절이었습니다.



남성과 똑같은 교육제도 아래 똑같이 직장을 다니다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의 타고난 성적인 차이가 있을 뿐 그 외에 남녀 차별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여자에게는 다른 세상이 펼쳐더군요.



명 결혼 전까지 나는 유능하고 매력적인 한 여성이었는데, 결혼 후 그저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요즘에 깨어 있는 시부모님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며느리로서 자잘하게 불합리한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남편과 나의 위치와 그 역할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사위로서 남편이 받는 대접과 며느리로서 제가 받는 대접은 달랐으니까요.

뭔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찝찝하고 기분이 언짢아지는 이 상황의 최대치는 명절에 나타납니다.



명절 음식 만드는 것부터 식사를 차리고 뒤처리까지 모두 여자의 몫입니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장 다닐 때보다 더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저희 시댁은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절 음식을 합니다. 전을 부칠 때면 종종 집안의 남자들이 도와주기도 합니다. 완전 꽉 막힌 집안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님을 도와 삼시세끼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며느리 몫입니다. 



밥 먹고 나서 소파에 앉아 이야기하는 남편이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요. 시부모님 앞에서 남편은 제 남편이 아니라 시어머님의 아들이 되어버립니다. 집에서는 잘 도와주던 사람이 아들모드로 게으름을 피웁니다. 자기 아내가 힘든 것이 잘 안 보이나 봅니다.

 그러다가 집에 올라갈 때쯤 "고생 많았어." 이 한마디로 퉁치려고 하죠.



나름 깨어있다고 생각했던 시부모님도 명절이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을 진리마냥 쏟아냅니다.


"그래도 명절날 아침은 시댁에서 시부모님과 보내는 것이 맞다."

(아니, 그럼 딸만 있는 집은요? 그런 법이 어딨나요?)


"남편 잘 챙기고, 가을에는 녹용이 든 한약 좀 해 먹여라."

(서로 잘 챙겨야죠. 본인 몸이 아프면 본인이 해 먹겠죠.)


"요새는 큰 형말을 듣지 않으니까 형제끼리 잘 못 뭉친다."

(큰 형이 큰 형다우면 잘 듣지 않을까요? 동생들도 각자의 의견이 있는데 존중하면서 의견을 맞춰 가는 게 맞지 않나요?)


"요즘 며느리들 시금치의 시자도 듣기 싫다고 하는데, 그래도 시부모님에게 연락은 자주 해야 한다."

(저희 친정보다 더 자주 연락 드리고 있어요. 이것보다 더 자주 바라시는 건 욕심이십니다.)



며느리라는 삶에 조금씩 익숙해지려고 하다가도 저런 말을 들으면 욱한 감정이 올라와 반항심이 생깁니다. 시어머님의 말에 저렇게 토를 달고 싶어도 꾹 참고 속으로만 생각을 하죠.

결혼 전에는 몰랐습니다. 한국 사회가 아직도 남 중심 문화라는 것을요. 사회가 많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더군요. 예전 세대인 시어머님 자신렇게 살았었다며 지금의 저에게도 그렇게 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그럼 딸 가진 집들은 명절날 그냥 혼자 밥 드시겠네요."

"그럼, 시댁에서 명절 보내고 친정에 가는 거야. 우리 때는 다 그랬어."

"며느리로서 듣기 좋않네요."

10년 차 며느리인 저는 그냥 질러버렸습니다.



한 여름처럼 뜨거웠던 이번 추석 명절. 시댁에는 에어컨이 없어  형님 식구들과 시어머님까지 저희 집에 모였습니다. 센스 있는 형님께서는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가셨습니다.

소파에 누워 깜 잠든 남편의 등짝을 보면서, 시어머님이 보시는 TV 소리를 들으며 밥을 차렸습니다. 당연히 설거지도 제 일입니다. 

마음대로 글쓰기도 못하고 책도 양껏 읽지 못하고, 삼시 세끼 밥을 차리고 치우느라 하루가 갑니다.

명절은 쉬긴 쉬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연휴입니다.



밥 먹고, 치우고, TV 보고, 이야기 좀 나누고...

평소 주말에 찾아뵐 때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명절까지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통체증까지 겪어가면서 말이죠.



그래도 10년 차 며느리가 되니 쉬는 시간에 방에 들어가 누워있을 수도 있고 할 말을 질러버리는 배짱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꼴 보기 싫다고 대판 싸우기보다 요령껏 명절 후 일주일을 부려먹을 줄도 압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 내가 아무리 말해도 어른들은 안 바뀌지.' 하고 내려놓는 태도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넘기려고도 합니다.

무엇보다 도리는 하되 무리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게 명절 연휴를 무사히 보내는 저의  며느리 생활 10년  차 노하우입니다.





명절

: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연휴

: 남편이 꼴 보기 싫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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